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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청 Nov 16. 2020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

책-이충걸

“유청! 새로운 호칭을 정해야 돼. 나는 더 이상 편집장이 아니니까”


“아! 그렇죠. 뭐가 좋을까요?”


“니가 정해봐 편집장님 빼고 뭐든 다 좋아”


“음! 그럼 형이라고 할까요?”


“형! 좋다. 빨리 폰 꺼내서 연락처도 수정해”


“네! 형”


충걸이형이 GQ 편집장을 그만둔 순간이었다. 2018년 2월의 마지막 날. 호칭을 다시 정한 건 충걸이형 집 근처 커피숍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지큐를 들고 가서 사인을 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햇수로 18년, 17주년 창간기념호를 마지막으로 물러난 편집장치고는 꽤 담담해 보였다.


“그럼 이제 뭐 하세요?”


“계속 써야지. 출판사 편집자들이 하도 괴롭혀서 백수 과로사 하게 생겼어.”


“ㅋㅋㅋㅋㅋㅋ”


충걸이형과 헤어지고 다른 카페로 이동해 GQ를 읽었다. 언제나 그랬듯 창간기념호 다웠다. GQ는 창간호가 3월호다. 그래서 매년 3월호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긴다. 책등 부분에 세로로 들어가는 타이틀과 로고의 폰트 변화부터 시작해서 꼭지를 바꾸고 새로운 기획을 채워 넣고, 레이아웃을 다르게 하는 등. GQ 3월호는 올해는 이런 스타일로 가겠다고 밝히는 출사표 이자 독자들에게 전하는 새해 인사였다.


예전에 충걸이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GQ는 우주 같은 존재라서 나름의 사이클이 있다고. 나는 그걸 지큐력이라 표현했다. 세상에 음력과 양력이 존재하듯. 3월호는 지큐력에 따르면 설 명절이 낀 시기인 셈이다. 충걸이형이 만든 마지막 3월호도 역시나 멋진 새해 인사였다. 물론,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아마도 충걸이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년 이렇게 구성을 바꾼다는 건. 새로운 편집장이 GQ를 그렇게 만들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일테니까. 그리고 새로운 편집장은 패션 디렉터를 거친 사람이라 정말 컬러풀하고 예쁘게 잘 만든다. 이제는 충걸이형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조금 섭섭할 때도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은 충걸이형이 GQ 편집장으로 살았던 18년의 기록을 모은 책이다. 매달 마지막에 쓰는 에디터스 레터의 글을 모은 책. 에디터스 레터는 항상 매달 마지막에 쓴다. 에디터들의 글을 다 보고 얼추 마무리됐을 무렵. 책의 147페이지에 있는 단락은 에디터스 레터를 쓰기 직전 편집장의 상태를 아주 명확하게 묘사했다.

“편집장은 메뚜기를 씹으며 활자의 광야에서 외친다. 발톱을 세운 아버지의 독수리. 자비로운 불의의 교사. 에디터 기저귀를 갈아주다 오줌소태에 걸린 호구. 할당된 페이지를 여태 못 쓴 지진아. 흠투성이 인간. 거울에 기대 머리카락이나 꼬는 하릴없는 자”

카페에서 “에디터 기저귀를 갈아주다 오줌소태에 걸린 호구”라는 문장을 읽다가 완전 빵 터졌다. 지난달 내 모습을 본 건가? 싶기도 해서. 아무튼 에디터스 레터는 이런 글이다.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조금만 더 미뤘다가 쓰는 글. 업계의 이슈에 관해 쓰기도 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때로는 디스하고 싶은 존재를 골라 편지를 쓰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에디터스 레터는 잡지, 그리고 업계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고 운신의 폭이 큰 편집장의 공간이다.


에디터스 레터를 한참 후에 다시 읽으면 그달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한 달에 마침표를 찍는 일기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편집장의 그런 순간들을 기록한 글을 모았다. 250여 개의 글을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담았다. 18년 동안 매달 찍은 마침표를.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이 책을 읽었다. 단순히 텍스트가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편집장으로서, 충걸이형의 오랜 친구이자 팬으로써. 트위터를 처음 시작했다는 에디터스 레터를 읽고 당연히 씹힐 거라고 생각하며 무심코 DM을 보냈는데 너무 사려 깊은 답장을 해줘서 감동했던 그날(그게 충걸이형과 친구가 된 계기였다)도 떠올랐고. 마감 와중에도 아빠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와줬던 날도 떠올랐다. 그리고 한번은 내가 직접 내린 커피가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핸드드립으로 텀블러에 꽉꽉 채워서 편집장실에 갖고가 티타임을 했던 그 날의 기억도 생생했다. 충걸이형은 스승 같았고, 친구 같았고, 때로는 철없는 동생 같았다. 그래서 참 재밌는 관계가 아닐까 싶다. 나보다 얼추 스무 살은 더 많은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한번은 점심 약속이 있어 둘이 밥집을 향해 총총 걷다가 손을 잘라 먹을 기세로 쾅쾅 닫히는 거대한 건물의 로비 출입문을 보며 충걸이형이 말했다. “유청! 너는 뒷사람을 위해 문을 살짝 잡아주고, 앞에서 잡아주면 감사의 표시로 살짝 목례를 하는 그런 매너가 남자를 얼마나 섹시하게 보이게 하는지 아니?”라고. “남자가... 임마, 남자는... 어!”이런 마초적인 가르침은 수없이 받아왔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어른은 충걸이형이 처음이었다. 남자의 매너와 섹시함 이라니...


어쩌면 이래서 GQ를 그렇게 열심히 읽고 모았던 게 아닐까 싶다. 처음 GQ를 읽기 시작한 2009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매달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둔다. 이사를 하며 다른 잡지는 다 버려도 GQ는 여전히 보관하고 있다. 대략 11년 분량을. 한 번도 공짜로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요청해도 줄 사람도 아니었다. 몇몇 친구들은 충걸이형을 이용해 커리어를 쌓으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친구인데 GQ를 계속 돈을 주고 사서 본다는 걸 이해 못 하는 지인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친구는 서로의 업적을 응원하는 존재”라는 충걸이형의 말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의 권세를 이용해 내 커리어를 높이거나, GQ를 단 한 번도 공짜로 바란 적이 없는 것은. 어쩌면 이런 모습 자체가 책 제목처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이 아니었나 싶다. 통속적이지 않아서 혹자들이 보기엔 이상한 사이 같지만 상호 간에 특별한 존재라는 걸 너무 잘 아는 그런 사이.


마치 이 책은 충걸이형이 자신의 수많은 친구에게 은밀하게 보내는 선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친구는 이 책을 읽으며 충걸이형과 관련한 자신만의 감정과 감각을 잔뜩 느끼고 있을 테니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2018년 3월호를 꺼내 에디터스 레터를 다시 읽었다. 책의 마지막에 배치한 글과 같은 글. 책에선 ‘마지막 에디터스 레터’라고 소제목을 달았지만, 잡지엔 ‘세월은 흘러가고 작별의 날이 왔네’라고 쓰여 있다. 원제목이 역시 그 당시의 감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에디터스 레터를 읽고 페이지 상단에 그날 충걸이형이 싸인과 함께 적어준 문장을 한 컷 찍어 두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의 특별함을 입증하는 증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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