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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예신 Apr 20. 2024

누드교과서의 추억, 그리고 스테이블코인

NUDE textbook and stablecoins

'이런 것도 나비효과인가?'


지난 17일 저녁, 연대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생각이다. 내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잠복해 있었던 중요 키워드인 '누드교과서'와 '세계사'가 이날 강연의 주제였던 '스테이블코인'과 연결되었음을 문득 깨닫고선 소름이 돋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가져 왔던 것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이 되었음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더욱 소름이 돋았던 건, 이 강연에 초대해준 분이 누드교과서를 출판한 이투스 교육그룹 창업자인 김문수 회장님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CEO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한 독서클럽에 나를 연사로 초대해주셔서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신뢰 이동>이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고 온 것이다. 심지어 나는 김문수 회장님을 4개월 전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1. 고3, 한 줄기 빛이 되어준 누드교과서 세계사


때는 2007년 늦가을, 내가 고2 막바지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학교 지정 과목은 국사, 한국근현대사, 사회문화, 윤리와사상. 역사 과목은 최태성 선생님의 인강으로 재밌게 공부하고 있었고, 사회문화도 그럭저럭 공부하고 있었다. 문제는 윤리와사상이었다.



과목 자체가 나랑 너무 맞지 않았다. 공부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에 한 명 있는 윤리 선생의 수업 실력도 형편없었다. '난 서양윤리 전공이라 동양윤리는 모르니까 나한테 묻지마. EBS 수능특강 교재 보면서 알아서 공부해'. 퇴직을 앞두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shit 같은 선생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난 고3을 맞이했고, 커다란 고민에 휩싸였다.


'윤리와사상을 계속 붙들고 공부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걸 버리고 다른 과목으로 갈아탈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교회 집사님겸 과외선생님이던 한 은사님께서 세계사를 공부해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처음엔 주저했다. 우리나라 역사만 해도 공부할 게 많은데 세계사라니. 그런데 은사님 왈, 세계사는 범위는 넓지만 깊이가 아서 의외로 공부하기 수월할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투스 교육그룹의 '누드교과서 세계사 SE' 참고서를 추천해주셨다.

누드교과서 세계사 SE


'존경하는 은사님의 추천이니, 그럼 한번 세계사를 공부해볼까?'


윤리와사상보단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서점에 가서 '누드교과서 세계사 SE'를 구입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페이지 이곳저곳을 펼쳐보았는데,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먹었다. 서술 방식, 구성, 내용 등 모든 부분이 여타 참고서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재밌고 상세했다. 뭐랄까, 똑똑한 동네 형, 동네 누나가 설명해주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그래서일까. 누드교과서로 세계사를 공부하면 성적이 잘 나올 것 같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그런 자신감을 억지로라도 가져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고3이 되어 그간 붙잡고 있던 윤리와사상을 버리고 세계사 공부를 처음부터 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그리고 4월쯤 쳤던 모의고사에서 1등급을 받았다. 윤리와사상 과목에서 받지 못했던 등급을 받았더니 엄청난 용기가 생겼다. 그 기세를 몰아 공부한 결과 수능 때까지 거의 1등급을 놓치지 않았다.



2. 그래서 그게 스테이블코인과 무슨 상관인데?


성인이 되어서도 글로벌 다큐를 종종 시청하며 세계사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던 건 아마 고3 때의 좋은 기억 덕분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려고 억지로 끼워맞추는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난 오히려 한국보단 지구 건너편 여러 나라의 이런저런 사정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생 땐 가능한 한 global things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었다. 미군부대 PAO(공보실) 외신기자 포지션에 지원해 합격한 뒤 열일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기사 잘 썼다고 미 국방부 사령관한테 메달도 받았었다. 벌써 10년 전.


그리고 지난해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집필할 때의 일이다. 내 책을 혹시라도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책은 단지 스테이블코인 뭐시기에 대한 개념, 기능, 구조 이런 것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 개발도상국의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대안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례, 온오프라인의 새로운 결제수단으로 진화할 가능성 등을 복합적으로 다룬 책이다.


자연스레 아르헨티나, 튀르키예,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중국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 상황과 지정학적 위기, 금융 인프라, 현대 역사에 대한 내용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3 때 누드교과서로 세계사를 공부했던 것처럼, 책 집필을 위해 세계 곳곳의 역사를 리서치했다. 책을 집필하는 것 자체는 참 힘들었지만, 내가 몰랐던 세계 여러 나라의 사정을 탐구하는 과정은 상당히 즐거웠다.


강연 자료 중. 이런 걸 나 말고 누가 관심 있어 할까.

내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재밌게 탐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분명, 누드교과서로 세계사를 재밌게 공부했던 고3 시절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고3 수험 시절과 책 집필 과정을 가만히 돌이켜보니, 수험생 시절 공부했던 세계사의 여러 장면들이 내 무의식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주제와 만나 책으로 다시 꽃핀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누드교과서를 출판한 이투그 교육그룹의 회장님을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되고, 초청을 받아 스테이블코인을 주제로 강연까지 하게 되었으니, 소름이 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글 서두에 썼던 것처럼 '이런 것도 나비효과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양누리에 세워진 입간판. 그리고 강연 후 백양누리 야경 한 컷.


사실 책이 대박나려면 개도국의 금융/경제 현황이나 스테이블코인과 관련된 주제로 쓰면 안 된다. 출판사 측과 기획 협의를 할 때 투자와 관련된 내용을 담을 것을 종용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좋은 가치를 담을 수 없는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 고집을 밀어붙여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금융의 미래>라는 책이 나왔고, 덕분에 대한민국 외교부 대사님, 위메프 회장님, 투자사 대표님, VC 대표님 등 여러 C레벨들 앞에서 강연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 앞길이 어떻게 펼쳐질진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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