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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베 놀이에서 만난 칸딘스키

점, 선, 면으로 쌓아올린 아이의 추상과 내적 필연성

by Leading Lady

집에 있는 수많은 장난감들 중에서 아이가 가지고 놀 때 유독 흐뭇해지는 장난감이 있다면 바로 '가베(Gabe)'일 겁니다. 레고 등 다른 블럭들도 소근육이 발달될 수 있고 다양한 형태로 아이디어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가베놀이를 하면 왠지 그에 더해 논리력도 향상되고 수감각도 좋아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달까요. 가베를 창시한 독일의 교육학자 프리드리히 프뢰벨(Friedrich Fröbel)은 흥미로운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을 동그라미, 네모, 세모 같은 기본 도형으로 나누어 파악할 때 세상의 질서를 더욱 쉽게 습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아이들이 단순한 모양부터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입체 형태를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주의 질서와 자연스러운 조화를 내면화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이가 가베로 형태를 만들고 놀이한 흔적들


가베와 칸딘스키, 점·선·면으로 만나다

어느날, 아이들이 가베 조각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칸딘스키가 떠올랐습니다. 가베의 형태를 이루는 점, 선, 면, 입체의 조각들은 칸딘스키가 회화의 보편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 연구했던 바로 그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프뢰벨과 칸딘스키 두 사람 모두 19세기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고,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더 깊은 본질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프뢰벨이 교육을 위해 세상을 추상적으로 분해했다면, 칸딘스키는 오히려 가장 추상적인 요소인 '점'에서 출발하여 그림 언어를 구축했습니다. 프뢰벨은 교육을 통해, 칸딘스키는 예술을 통해 관객이 현상 너머의 본질, 즉 실재에 닿기를 원했다.


원래 러시아의 법대 교수였던 칸딘스키는 그의 나이 30세에 불현듯 독일로 이주하여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사진기가 발명된 지 이미 100년이 되어 가는 20세기 초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똑같이 묘사하는 것보다 그림이 주는 정서와 에너지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1910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그때까지 실험적 시도로만 여겨지던 추상미술에 이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추상미술이 미술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칸딘스키는 예술작품이 지금까지는 외부 세계를 따라 그려왔지만, 이제는 단순한 재현보다 예술가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정신적 표현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죠. 이후 바우하우스에 재직하던 1926년 저술한 <점, 선, 면>에서, 그는 회화를 구성하는 표현의 요소를 세세하게 분석하여 각각의 요소가 어떤 고유한 긴장과 에너지를 형성하는지 매우 상세히 기술했습니다. 마치 시각 언어의 문법책 같은 이 책에서 칸딘스키가 말한 회화의 기본 어휘인 점, 선, 면의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점(Point): 최초의 흔적이자 모든 창조의 기원. 칸딘스키에게 점은 침묵이자 잠재성이며,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작은 세계다.

선(Line): 점의 움직임. 선은 칸딘스키에게 있어 방향과 긴장을 지닌 힘이다. 그는 선의 '온도'와 '긴장'을 분석했는데, 수평선은 차갑고 안정적이며, 수직선은 따뜻하고 상승하는 느낌을, 대각선은 이 둘의 역동적인 종합을 나타낸다고 했다. 광적인 낙서는 차분한 물결선과 다른 내적 성질을 지닌다.

면(Plane): 선으로 경계 지어진 표면. 공간을 채우는 행위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무엇을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아이의 창작물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래는 제 아이가 5살 때 가베로 만든 형태인데,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적 모양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모양새입니다. 오른쪽 상단에 모여 있는 강력한 직선 다발들이 대각선 아래를 향하면서 운동감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은 차가운 성질(수평선)과 따뜻한 성질(수직선)이 결합되어 역동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죠. 칸딘스키에게 곡선, 특히 원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선'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정신적인 형태입니다. 중앙과 하단을 지배하는 파랑, 노랑, 빨강 고리들은 곡선이자 원으로 화면에 평온함, 그리고 무한함을 부여하면서 역동적인 직선들과 긴장관계를 형성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업은 무질서한 에너지와 막 생겨나는 질서 감각이 대조와 균형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역동적이고 리드미컬한 구성을 보입니다. 아이는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이러한 대조가 만들어내는 미학적 원리를 본능적으로 활용한 셈입니다.

아이가 놀이하다 칸딘스키의 composition 을 연상하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아이의 놀이 흔적에서 보이는 이러한 시각적 특징들은 칸딘스키의 1926년 작, '구성 VIII'(CompositionVIII)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칸딘스키 스스로가 전후 작업의 정점이라 이야기한 작품으로, '캔버스 위에서 펼쳐지는 형태와 색의 춤'이자 '혼돈 속의 조화를 창조하는 시각적 교향곡'으로 불립니다. 밝은 배경 위 기하학적 형태로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보여 주는 칸딘스키 작품처럼, 아이의 가베 작품 또한 나름의 논리를 지닌 완성된 하나의 우주처럼 여겨지지 않나요?

Wassily Kandinsky, Composition(1926), oil on canvas, Guggenheim Museum.


칸딘스키 예술론의 핵심에는 ‘내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이 있습니. 예술가가 꼭 그렇게 표현했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 칸딘스키에게 진정한 예술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비밀로 가득 차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스런 방식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창작 활동은 내적 필연성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미술사조나 비평가의 평가, 상업적 성공과 같은 외적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그들의 창작 행위는 오로지 놀이 자체의 즐거움, 즉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오는 내적인 만족감에 의해 추동되죠. 이는 칸딘스키가 예술가에게 요구했던 이상과 맞아떨어집니다. 외부의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내적 음향(innerer Klang)'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무더기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끄집어낸,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내적 필연성.



아이의 작은 손이 가베 조각을 신중하고도 분주하게 옮기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순간, 이 도형들이 품은 수학적 원리를 알려주고픈 어른의 조급함이 고개를 들지만 이내 마음을 내려놓습니다다.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이 오히려 아이 스스로 깨우칠 기회를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죠. 어쩌면 칸딘스키의 점, 선, 면의 원리는 아이들에게 너무나 직관적이어서, 섣부른 가르침이 오히려 내적 필연성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쌓아가는 과정을 방해할지도 모릅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놀이가 건네는 순수한 순간들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만, 잘 준비해서 눈을 뜬다면 아이는 거의 언제나 위대한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제 일상에 얼마나 사소하지만 경이로운 미적체험의 순간이 되는지, 오늘도 이 사소함이 너무나 소중하여 기록하고야 맙니다. 그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저의 내적 필연성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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