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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아 강유 Oct 21. 2022

경찰은 영웅이 아닙니다

입직 후 두 번째 경찰의 날을 맞아 동료분들께 드리는 글

*해당 글은 현직 경찰관이 경찰 내부망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은 경찰의 날 기념 글입니다. 



입직 후 두 번째 경찰의 날입니다. 소수의 경찰과 가족들을 제외하면 별 의미 없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마실 놈들은 또 퍼마실 테고, 깽판 칠 놈들은 또 치겠지요. 오늘도 어떤 이들은 경찰 제복을 보자마자 욕부터 할 것입니다. 불만과 열등감을 풀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겠지요. 그리 생각하면 경찰의 날이 뭐 별 건가 싶지만, 아무 말 없이 넘어가면 정말 보잘 것 없는 날이 될 것만 같습니다. 막 시보도 벗어났으니, 몇 글자 끄적여 경찰의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중경(중앙경찰학교. 신임경찰 교육 기관)에는 아직도 "젊은 경찰관이여, 조국은 그대를 믿노라"하는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수험생들에게는 목표를, 교육생들에게는 희망을, 현직 경찰관들에게는 의무를 상기시키는 글입니다. 중경이기 때문에 '젊은'이란 말이 붙어 있는 거겠지요. 그러니 조국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조국은 경찰관을 믿는다"일 겁니다. 언제 봐도 묘한 표현입니다. 조국이 왜 경찰관을 믿습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라는 본래 정의를 표상하지 못합니다. 나라가 정의를 지키려면 그 구성원들이 합리적이고, 절제할 줄 알며, 양보할 줄도 아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아온 경찰 동료분들께선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세상엔 그런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을. 작금의 다수 국민들은 개인의 성취를 챙기려할 뿐, 인간으로서의 존엄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공허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욕을 내뱉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 남을 범죄자로 만들고, 미약한 층간소음 때문에 주먹과 칼이 오가고, 고작 돈 몇푼을 받으려 부풀리고 속입니다. 뿐만 아니라 티비속에선 오로지 쾌락만이 삶의 전부라 말하며, 화려한 외양과 거짓된 태도로 겉을 포장하길 권합니다. 그런 삶이 멋진 삶이고 추구할만한 인생이라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렇게 사익과 쾌락 추구, 무절제가 당연시 되는 세상입니다. 이런 시기에 제복을 입겠다는 맹세야말로 트렌드를 역행하는 돌연변이 같은 선언이겠지요. 트렌드가 정의를 역행하고 있으니 정의롭기 위해선 외려 트렌드를 역행해야 합니다. 조국은 트렌드를 역행한 경찰관을 믿을 수밖에 없나 봅니다. 사라져가는 존엄과 정의를 되찾기 위해 달리 누굴 믿겠습니까. 개인의 신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조국의 정의 따윈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조국은 감히 경찰'관'을 믿습니다. 


 전 조국이 정의를 수행하지 못하고, 그 정의를 누군가에게 위임해야만 하는 현실이 달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조국과 조직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대가 영웅이다."하는 식의 선전입니다. 


 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슬픈 나라입니다.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희소한 나라에서만 영웅이 존재할 수 있으니까요. 모두가 제 의무를 다하는 세상에 영웅이란 단어가 필요하긴 합니까? 영웅은 정의가 무너진 나라에서만 추구하는 철 지난 개념입니다. 


 그러니 저는 경찰의 날을 맞아 '영웅'경찰관들을 추모하자는 글과 말이 나돌 것이 벌써부터 싫습니다. 평소 행동하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이들이 엄숙한 가면을 쓰고선 "당신이 바로 영웅입니다."하는 낯 뜨거운 찬사를 보내는 것 같아서요. 영웅이라니! 얼마나 비열한 박수입니까. 여기서 영웅이란 찬사는 개인을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합니다. 전 경찰의 날이 이런 영웅주의를 선전하는 날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직과 국가라는 미명하에 경찰관 개인의 희생과 봉사를 정당화하는 날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 그저 우리가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을 원할 뿐입니다. 비열해지지도, 나약해지지도, 굴복하지도 않고서 당당하게 의무를 수행할 수 세상을요. 저는 경찰관으로 살려면 눈치보고, 몸을 사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젠 그럴 때마다 제 나약함이 죽도록 부끄럽습니다. 동료분들께서는 저와 같은 괴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복을 입었단 이유 하나만으로도 명예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꿈을 좇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은 있습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저 평범한 개인일 뿐이니까요. 

 경찰의 날, 영웅주의에 찌든 공허한 선전 대신 동료들의 명예롭고 행복한 삶에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동료분들이 '영웅' 경찰이 아닌 '인간' 경찰로 존중받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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