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줄박이물돼지 Oct 27. 2020

딸랭구 키우기 #22

셜록 랭구

증권사들이 삽질한 덕분에 주식 주문도 계속 안되고 계좌도 잠기는 바람에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몸도 아주 피곤했다. 퇴근길에 마침 경기지역화폐를 갖고 있어서 꽃을 한 다발 샀다. 배고파서 대충 꽃다발 만들어 놓은 걸 살까 하다가, 다 너무 비싸서 만짜리로 새로 만들었다. 집에 꽂으실 거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했더니 포장을 간소하게 해 주시고 꽃을 많이 넣어주셨다. 동네 꽃집 최고다. 풀을 좀 많이 넣어달라고 우기려다가, 꽃이 퐁신한 느낌이라서 그냥 사장님께 일임했다. 노란색과 주황색 비눗방울을 잔뜩 들고 가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풀이 좀 아쉬워서 집에 가는 길에 강아지풀 하나 뜯어서 넣었다. 예쁠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안 어울려서 플로리스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에이스 크래커 샀는데, 부서질까 봐 가방에 넣지도 못하고 손에 들고 갔다. 딸랭구한테 에이스 크래커 들키면 달라고 떼쓸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엄마에게 꽃다발 전달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딸랭구한테 주면서 엄마한테 전해드려 했더니, 엄마! 선물이에요! 축하해요! 강아지풀도 있어요! 하면서 전해줬다. 강아지풀이 어울리지 않는 걸 알아채다니, 눈썰미가 날카롭다. 과연 마누랭구도 알아챘다. 풀을 중간에 길에서 뜯어왔다는 사실이 아주 웃겼던 모양이다.

저녁 먹고는 새로 산 팝업텐트를 거실에 쳐놓고 놀았다. 믿을만한 형님이 알려주신 물건이라 다른 건 검색해보지도 않고 샀다. 텐트 펼쳐 놓으니까 딸랭구가 엄청 좋아했다. 늑대 오니까 숨어야 된다고 지퍼도 다 잠그고 고개도 못 내밀게 했다. 안에서 블록이랑 아이스크림 장난감 가지고 놀았다. 먹는 시늉 열심히 해주고 딸랭구가 뭐 만들면 맞장구쳐주면서 놀았다. 텐트 안에 쪼그리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밖에 나간다 그랬더니 늑대 와서 안된대. 그래서 아빠는 호랑이니까 괜찮다고 주장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동화 읽어줄 때 호랑이 시늉 자주 해서 그런지, 여태까지는 잘 먹혔던 롤 플레이다. 그런데 어제는 주황색 털에 검은색 줄무늬도 없고, 어흥 소리도 안 내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너는 호랑이가 아니라 그냥 아빠야! 하는 바람에 벙쪘다. 셜록홈즈인줄. 애기가 이제 귀납추리를 할 수 있구나 신기했다. 뭐 하나 풍족하게 해주는 게 없는데, 잘 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딸랭구 키우기 #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