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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줄박이물돼지 Nov 03. 2020

딸랭구 키우기 #23

수신(修身) 부족의 초라함

지난주에 혼자 집에 있으면서 청소를 별로 안 했다. 딱 거슬리지 않을 정도만 했다. 나는 지저분한 곳에서도 잘 지내는 타입이라 깔끔한 우리 마누랭구가 보기에는 집안에 청소할 것이 많았으리라. 마침 마시던 와인도 다 떨어져서 청소할 시간도 벌어주고 와인도 사러 갈 겸 저녁 먹고 딸랭구를 데리고 나갔다. 낮에 먹다 남은 고래밥 한 봉지와 매실차, 물티슈, 경기지역화폐를 챙겨주었다. 와인 가게 까진 좀 멀긴 하지만, 채비를 갖추어서 다녀오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고래밥만 있으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딸랭구는 킥보드를 타고 간 덕분에 별로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계속 시합하자고 해서 조깅하듯 달렸다. 하천 주변 산책로를 따라가다가, 산책로가 끊기는 지점쯤에서 힘들다고 했다. 모기 때문에 보급 지점 선정이 쉽지 않았다. 산책로에서 벗어나 조명이 좀 밝은 공원 의자에서 고래밥과 매실차를 좀 주고 와인 가게까지 갔다. 엄마가 와인 좋아하니까 두 개 사자, 여기는 모기가 아주 많으니까 위험하지? 엄마 모기, 아빠 모기, 이모 모기, 할머니 모기, 할아버지 모기, 삼촌 모기, 외숙모 모기 다 있어! 저기 보라색 병이 있는 곳이 와인 가게야! 종알종알 신나게 떠들어 대는 게 투어가이드 못지않았다. 그래서 방심했다. 와인 가게에서도 착하게 굴 것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애기가 너무 신이 났던 것이다. 와인 가게에서 숨바꼭질을 하자고 하더니, 여기는 너무 밝아서 숨을 곳이 없다며 가게 안에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바닥에도 와인이 잔뜩 있는 가게라서 넘어지면 애기도, 와인들도 모두 위험했다. 사장님도 이건 진짜 위험한데, 하고 걱정하셨다. 근데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애기가 와인 사이사이로 뛰어다니는 걸 어른이 어떻게 잡아.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운 좋게 몰았다. 입구 쪽이었다. 여기서 뛰면 안 된다고 그랬더니 뛰고 싶다고 울었다. 엄마엄마 부르면서 세상 서럽게 울었다. 지가 잘못해놓고 억울한 척 오졌다. 다행히 와인을 이미 골라두었다. 사장님 추천받은 거 하나랑 저번에 먹었던 거 하나 사기로 했다. 고래밥 준다고 달래서 나오려는데, 애기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사장님이 Loacker 초콜릿 조그만 걸 하나 주셨다. 초콜릿 먹이면 엄마한테 혼날 거 같은데, 이미 받아버려서 어쩔 수 없이 반반 사이좋게 나눠 먹자고 했다. 그러면서 고래밥은 오늘 안 먹고 내일 자고 일어나서 먹기로 약속했다. 아까 고래밥 먹었던 곳에서 Loacker를 먹이고, 거미줄에 걸린 모기들을 보여주면서 얼른 도망가야 된다고 꼬셔서 집에 데려왔다. 집에 가면 얼른 샤워하기로 약속도 했다. 와인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종이봉지에 넣어주셨는데, 도저히 들고 갈 수 없어서 육아 아이템들이 들어있는 에코백에 넣었다. 다행히 꼭 맞게 들어갔다. 돌아가는 길은 내리막인데, 킥보드 타고 다니는 딸랭구를 따라다니느라 더 빨리 지쳤다. 집 근처에 와서는 킥보드도 내가 들어야 했고, 찻길도 몇 번 건너야 해서 신경이 더 쓰였다. 각고의 어려움 끝에 집에 도착해서 와인을 담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봉투가 젖어서 구멍이 뚫려있었다. 와인이 두 병이었고 에코백 안에 보온병도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조심해서 들고 온다고 왔는데도 깨졌나부다. 가슴이 철렁했다. 한 병씩 꺼내보는데 다행히 깨진 건 아니고 딸랭구 손 닦아준 물티슈가 종이봉투에 비벼져서 생긴 흔적이었다. 안도하며 에코백 안을 봤는데 먹던 고래밥이 다 쏟아져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으아, 고래밥 다 쏟아졌어. 하고 에코백에서 고래밥 봉지를 꺼내는데 그걸 또 손 씻으러 들어갔던 딸랭구가 나와서 봤다. 딸랭구가 고래밥 달라고 떼쓰려는 찰나에, '그걸 여기서 왜 꺼내' 한심해하는 투정이 들렸다. 여러 스트레스가 담겨있던 그릇을 뒤엎는 한 방이었다. 오갈 데 없이 쏟아진 분노가 가슴에 모였다. 나도 모르게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뱉어내서 후련했지만 바로 후회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딸랭구 샤워하나 보러 갔는데 마누랭구랑 마주쳤다. 왜 소리 질렀냐고 물어봐서 화나서 질렀다고 했다. 그래도 애 앞에서 소리 지르면 안 된다고 했다. 나도 몰라서 소리 지른 건 아닌데, 가끔 화를 참기 어렵다. 화를 참지 못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들에게 부적절한 방법으로 화를 내선 안된다. 내 행동은 매우 부적절했다. 내 인격이 충분히 도야되지 않았다고 느껴서 크게 좌절했다. 성격의 단점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단점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그리고 보통 평생 걸리는 과업들이 그러하듯, 생각대로 잘 안된다. 복잡한 감정으로 침대에 누워있다가, 마누랭구한테 잘못했고, 미안하며, 서운했던 건 이거고, 혼자서는 화를 참기 어려울 때가 있으니 도와달라고 편지 썼다. 그러고 보면 우리 딸랭구도 잘못한 주제에 혼내지 말라고 성질내는데, 그게 다 아빠를 닮았나 보다. 마누랭구가 용서해 주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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