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 4. 2021 여름, 가을
[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는 2020년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선포된 후 예술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교육실천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내용의 에세이입니다.
지난 봄 내내 그림책을 읽으며 생기발랄한 어린이들과의 시간을 보낸 뒤, 여름부터는 여러나라에서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도 다각도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찾고 있는 예술교육실천가들과 국제교류활동을 했다. 예술교육실천가는 Teaching Artist(가르치는 예술가, 이하 TA)를 국문으로 풀어쓴 말로, 예술의 가치를 사회참여적으로 확장하는 데 중점을 둔 예술가, 또는 예술교육가를 의미한다.
여러나라의 예술교육실천가들이 교류하는 장으로 유네스코 유니트윈 학술대회(Unesco Unitwin)와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nternational Teaching Artist Collaborative, 이하 ITAC) 두 가지를 소개할 수 있다.
우선 유네스코 유니트윈 학술대회는 전 세계의 다양한 대학과 연구기관이 모여 문화적 다양성과 지속가능 발전을 위해 예술교육연구를 하는 씽크탱크로, 2021년에는 한국이 주빈국이 되어 행사를 치뤘다. 제4회를 맞이한 본 대회에는 “위기의 시대, 행동하는 예술교육”이라는 주제 아래 전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예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고민을 가진 예술교육실천가들이 모였다. 대회는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온라인에서 진행되었다. 웨비나라는 말이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라 국제행사가 온라인으로 치뤄진다는 게 어색했지만, 행사를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촘촘한 행정력과 기술인력과의 협력은 안정적인 플랫폼을 제공했다.
제4회 유네스코 유니트윈 학술대회 뿐 아니라, 2020년 9월에 개최되었던 제 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 또한 온라인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전 세계의 TA들이 위기 속에서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ITAC(International Teaching Artist Conference)은 전 세계 예술가, 예술교육가들이 예술교육의 가치와 역할, 실천방향을 모색하고 공동의 이슈를 탐색, 답변해 나가는 전문가 국제 교류의 장이다. 201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1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격년제로 열리며, 2020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이 예술교육에 갖는 진지한 관심은 제2차 2010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발의한 예술교육 실행계획을 담은 선언인 ‘서울 어젠다’를 통해서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서울 어젠다는 '예술교육의 일상화'를 주요 화두로, 예술교육의 성과를 점검할 수 있는 구체적, 실제적인 이행지침을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또한 예술교육 정책의 방향을 선도하고 국제적 협력을 통해 세계 예술교육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을 취한다. 서울 어젠다는 크게 세가지 목표와 각 목표별로 4-5가지의 개별 전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1년 파리 유네스코 총회에서 193개국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전 세계 유네스코 회원국들이 실천을 약속하였다.
서울어젠다가 발의된 2010년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는 내가 처음으로 참여했던 국제 예술교육 행사였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국립극장 방학특강을 같이 진행했던 팀과 함께 코엑스를 방문했다. 코엑스 메인 홀을 들어 섰을 때 천장에 매달린 색색깔의 티셔츠들을 보며 막연한 설렘을 느겼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행사 일정 중 하루만 잠깐 들른 탓에 여러나라에서 찾아온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워크샵에 참가하지 못해 내심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 후로 예술교육을 하면서 외롭고 고립된 느낌이 들 때면 종종 코엑스에서 보았던 예술교육가들을 떠올리곤 했다. 막연하지만, 내 안에는 예술교육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번에는 내가 발표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참여한 행사는 2021년 세계문화예술교육실천가대회의 일환으로 열린 제4회 유네스코 유니트윈 학술대회였다. 나는 “위기의 시대, 행동하는 예술교육” 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 마지막 날 예술교육 현장 사례를 발표했다.
나는 팬데믹을 마주한 예술교육실천가의 역할과 비대면 예술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기획했던 <그림책으로 그리는 나의 이야기> 수업 사례를 담아 <뉴노멀 청소년에게 그림책으로 질문 던지기> 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준비했다. (제목을 누르면 해당 발표를 볼 수 있다.)
2020년 하반기에 서울의 한 중학교 자유학년제 일환으로 진행했던 <그림책으로 그리는 나의 이야기> 수업은 학생들과 9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선정된 그림책을 읽고, 주어진 질문에 답을 찾아가면서 자신만의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으로 구성되어있다. 수업 중에 중학생들에게 던진 9가지 질문에는 팬데믹으로 변해가는 일상을 다시 보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나는 이 질문들을 통해 생계의 위협을 견디고 계실 부모님, 마비된 행정 시스템과 씨름하고 계신 선생님, 개학이 늦어져 아직 얼굴도 모르는 친구들, 그 속에서 환경이나 죽음, 생명 등 이 전에는 자주 언급되지 않았던 주제를 자주 접하게 되어서 철학적인 고민을 하기도 하는 청소년들이 일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사회적 위기 속에서 각자의 성장 서사를 기록하는 활동이 정서적 안전기지가 되기를 바랐다.
1. 가족 : 내가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좋아하는 가족의 모습이 있나요?
2. 친구 :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속마음이 있나요?
3. 가치 :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4. 비밀 : 나만의 비밀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5. 감정 :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6. 한계 : 한계를 넘어서 원하는 것을 성취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7. 생명 : 생명, 삶이라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8. 죽음 : 상상 속 죽음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요?
9. 팬데믹 : 팬데믹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긴 이웃, 가족,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팬데믹으로 변화된 청소년들의 뉴노멀이 표현된 그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작품은 오히려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일상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양성과 우정, 삶과 죽음의 양면성, 만남의 기쁨 같은 사소하고 보편적인 풍경이 담긴 그림을 그렸다. 나는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서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갈 힘은 변하지 않는 가치로부터 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이렇듯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내가 예술가 또는, 예술교육실천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예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오늘의 일상,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맺는 관계를 비추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사회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변화를 주기 이전에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인지하는 시간을 통해 현상을 드러내는 것 또한 뉴노멀 예술교육가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작품에 일상이 왜곡되거나 조작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반영될 때, 시각예술가는 시각화된 정보와 현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본질을 드러내는 작품은 감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을 탐구하게 하는 힘이 있다. 작품과 마주하여 감상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낸 진실은 그 사람의 일상에 새로운 관점이 된다. 이러한 순환이 예술로 이룰 수 있는 변화의 한 지점이다. 예술교육은 이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 감상자를 학습자로 전환하는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시각예술의 특징을 적극 활용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할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는 2021년 11월에 참여한 국제 교류 워크샵에서 찾을 수 있었다. 11월 한달간 참여했던 2021 Asia Teaching Artist Exchange Workshop은 아시아를 기반으로 활동중인 예술교육실천가들을 만나 기후위기에 대응한 예술교육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말레이시아, 홍콩,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5개국의 예술교육실천가들과 한 조가 되어 매주 한번씩 온라인으로 만났다. 6명의 TA들은 각 나라의 기후위기 현상과 그 속에서의 예술의 역할, 예술가로 살아가는 신념을 나누었다. 대화를 할수록 다양한 생물종과 공존하는 감각을 깨우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서로가 처한 상황은 다를지라도 각자가 발을 딛고 선 땅의 산물로 먹고, 마시며, 소비하는 일상은 공통적이었다.
예술교육으로 맺어진 우정으로 시작하여 지구와 공존하는 감각까지 확장하는 기회를 얻은 지금, '나에게 팬데믹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한번 질문하게 된다. 2020년 3월 시작된 팬데믹으로 동료와 지식의 부재에 막막해하던 나는 어느새 함께 돌파구를 찾아갈 여러나라의 동료를 얻었다. 그리고 내 감정을 표현하기에 급급했던 작품의 내용이 세상이 가진 가치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고보면 평화로웠던 일상을 깨는 팬데믹 덕분에 나에게 조금 더 넓은 시야가 생겼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나아가 공존하는 감각을 터득하면서 더 많은 생명의 평화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변이 바이러스가 조여오는 긴장을 피할 수 앖을 때면 답답하고 조급해져서 마음 한켠이 쭈그러드는 나를 발견한다. 위드 코로나로 전환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예술로 공존하는 감각을 조금 더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