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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윤지 Dec 21. 2021

마스크가 가릴 수 없는 것들

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 1. 2020년 봄, 여름

[우정의 언어 예술 | 팬데믹 다이어리] 2020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예술교육의 사회적 역할과 예술교육실천가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에세이입니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3월, 나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약속된 강의가 모두 무기한 연기되었고, 예상 가능한 범위에 있었던 일들이 혼란으로 치달았다. 그간 내가 주로 출강했던 학교나 미술관 등 공공기관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핵심 공간이기 때문에 언제 다시 강의를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팬데믹은 만남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예술교육현장을 멈추게 했다. 예술교육 외에 공연과 전시, 작가와의 대화 등도 모두 멈춰버려 주변 친구들도 눈물을 머금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임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함에 닥치는 대로 긴급 창작 지원금 공모에 지원서를 넣었다.


집콕 요리 (C) 2020. Gong Yunji

그리고 상황이 나아지면 언제든 출강하기 위해 건강 관리를 했다. 매일 확진자 추이를 지켜보며 불안함과 답답함을 안고 반강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했다. 처음에는 집에 머물며 평소에 보고 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퍼즐을 맞추고, 맛있는 요리를 해 먹었다. 오랜만에 긴 시간 집에 있으니 나름 휴가 같은 기분도 들었다. 31번 확진자 이후로 상황이 악화되자 재난 영화나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그린 콘텐츠에 눈이 갔다. 홈트 영상을 따라 하며 집콕에 지친 몸을 달랬고,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보드게임 팬데믹(Pandemic)을 하면서 감염병에 대처하는 전략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팬데믹 보드게임 (C) 2020. Gong Yunji

가끔 주변 동료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생계를 위해 강의 출강이나 공연, 전시 등을 할 수 없으니 당분간 대출을 받아 생활하거나, 나처럼 불안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글쓰기 작업을 하러 매일 찾아가던 공립 도서관 문이 닫혀 집에서 백수 취급을 받게 되었다고 하기도 했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코로나 시대의 엄마들은 육아로 작업 시간이 사라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었다.



다행히 초여름이 되었을 무렵,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열한 명의 아이들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아직 비대면 교육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 서너 번의 대면 수업만으로 아이들과 창작을 해야 하는데, 내가 이 만남을 잘 책임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첫 수업 날, 아이들의 얼굴에는 모두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늦어진 개학 때문에 친해질 틈이 없었던 아이들의 분위기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수업 전에 세워두었던 계획들은 대부분 실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몇 번 만나지 못하는 수업에서 아이들과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특히 창작 수업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줄 때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어떤 길잡이를 주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고민 끝에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는 주에는 편지를 써서 보내기로 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한계를 감동으로 채우면 좋을 것 같았다. 편지의 내용은 첫 번째 수업 때 받은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질문을 살펴보다 안도의 미소가 퍼졌다. 수업에 관심 어린 질문을 해준 것이 고마웠다. 여러 질문 중에 눈에 띄는 질문이 있었다. “어떤 계기로 그림책과 인연이 생겼나요?”라는 질문이었다.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나의 이야기와 짧은 안부를 적었다.


... 그림책과의 인연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습니다. 대학 졸업 후 여섯 살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미술 수업을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의 눈빛과 반응이 너무 열광적이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림책에 어떤 힘이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 그림책을 찾아보고,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림책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답니다....


내가 처음 그림책을 만났을 때 받은 감동이 얼마나 전해질 수 있을까. 답장을 받을 수 없는 편지를 보낸 터라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세 번째 수업을 하러 갔다. 여전히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각자 그림책에 녹여낼 주제를 진지하게 보여주었다. 밀도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없을 거란 걱정에 비해 아이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 속의 고민과 생각을 툭툭 늘어놓기 시작했다.

 

“코로나 때문에 방학이 짧아지는 게 싫어요.”
“친구도 못 만나고 집에만 있으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2120년에 사는 외계인이 코로나가 온 지구를 본다면 어떨까요?”
“심해에는 무엇이 살지 궁금해요.”
“꿈”
“서로에 대한 소통, 전 세계에 관한 이야기”
“인종차별에 대한 걸 만들고 싶어요.”
“흔들리는 내 마음이 불안해요..”
“부모님이 비교할 때 자존심이 상해요.”
“경쟁심”
“난 색깔이 없어서 늘 지는 것 같아요.”
“친구, 코로나, 학원, 학교, 더위 등등”


Global monitoring of school closures cuased by COVID-19 (Unesco.org 2020.8.2 결과 캡처)

이 때는 한참 동양인 혐오가 일어나고, 그 어디에서도 코로나19에 대응할 마땅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소식이 매일같이 전해지던 시기였다. 개학식은 커녕 등교조차 하지 못한 채 진공상태에 놓인 아이들의 생각을 듣자 나는 돌연 안도감을 느꼈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교실에서는 선생님과 학생으로 만났지만, 실은 같은 시간선에서 삶을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어른이라는 부담감과 위계를 벗어낼 자신이 생겼다. 그리고 팬데믹의 한계 속에서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고 있는 아이들이 멋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있고, 이 혼란 속에서 원인과 문제, 상상하기 힘든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이들에게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가진 고민을 그 누구보다 명민한 나의 동료들과 작은 교실 속에서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청소년들의 삶에 온 마음을 다해 관심을 가져보기로 했다.


학생들이 수업 중에 완성한 그림책 © 2020. Gong Yunji

유네스코 홈페이지의 Global Monitoring of School Closures caused by COVID-19에 매일 같이 업로드되는 전 세계의 교육 현황을 살펴보면, 내가 아이들과 만나 수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특별한 행운이었다. 비록 매주 만날 수도 없고, 대단한 완성도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아이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다는 건 꽤 호사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수업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까지 아이들도 나도 여전히 마스크를 벗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수업 분위기는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 아이들도 나도 낯선 상황에 나름대로 적응을 했고 우리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다. 마스크도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선명한 목소리를 가릴 수는 없었고, 덕분에 나는 다음 수업을 준비할 동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걱정하고 불안해하기에는 너무 귀한 시간을 얻었기에 생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교육 전문가들은 포스트 코로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비대면 교실에 오래 있다 보면 또래관계와 인성, 정서, 학력격차 등 다양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는 SNS를 비롯하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미 만나지 않고도 관계 맺고 있는 세상의 단면이 많이 있다. 그중에는 학습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연결된 세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우정과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정보와 지식, 표현의 창구가 다양한 시대의 장점을 활용하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해지도록 도울 수 없을까?


가을이 오고 있었고, 불안과 걱정에 잠식당했던 내 마음은 아이들과의 만남 덕분에 새로운 질문을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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