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파산관재인의 기록
2021년 3월 2일 오후 2시 ㅇㅇ지방법원 3331호 법정 앞.
톨스토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행한 사람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법정 앞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역시 각자의 불행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모두 제각각이어서, 민사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을 앞두고 있는 병사들과 같이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형사 판결을 앞두고 있는 피고인들은 재판장의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초조함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런데 여기 법정 앞사람들은 야근이 끝나고 퇴근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과도 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얼굴은 활력을 잃었고, 오래되어 한 귀퉁이 허물어진 성채와 같이 차림새는 허술하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이, 아니 기운이 없는 듯하다. 이 사람들은 파산 채무자들이다.
"2시에 파산 사건 집회로 오신 분 들이시죠. 이름을 부르는 순서대로 들어오시면 되고요. 재판 때 판사님이 추가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 조사가 끝났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분들은 재판 끝나고 기다리셨다가 저를 보고 가세요. 제가 추가 조사에 필요한 부분을 설명을 드릴게요. 조사가 끝났다고 하시는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면책에 대한 결정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은 아니고, 판사님이 기록을 검토하고 나서 댁으로 결정문을 보내드릴 거예요." 나는 오늘도 10명의 채무자들과 함께 그들이 아직 경험해 보지 못 한 파산, 면책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참이다. 나는 그들의 파산관재인이다.
자신의 모든 재산으로도 채무를 변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채무자는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고, 보유한 재산으로 빚잔치를 하고 나면, 남은 채무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일련의 절차를 파산, 면책 절차라고 한다. 파산관재인은 이런 파산 절차에서 채무자의 재산을 파악하고, 채무자가 가진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며, 채무자가 면책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역할을 한다. 파산관재인의 '관재'는 재산을 관리한다는 의미로, 파산관재인의 가장 큰 임무는 공평한 빚잔치를 벌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관재인은 각 법원의 파산 재판부에서 선정한 파산관재인단 풀(Pool)에서 선정되는데, 업무 특성상 변호사나 회계사가 파산관재인 업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2015년부터 한 지방법원의 파산관재인으로 일하면서, 연 200건 정도의 파산 사건을 관리하고 있다.
채무자도 자신의 빚의 늪에 빠지지라고 생각하지 못하듯, 나 역시 변호사로 개업을 하면서 파산과 관련한 일을 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애당초 회생, 파산 사건에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가장이었던 나는 회사 생활을 하다가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고 수험 기간 동안의 생활비와 학비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마이너스 통장이 있었다. 소위 돈을 벌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다. 그런데 회생이나 파산 사건은 큰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빚에 쪼들려 회생이나 파산 신청을 하는 분들이 의뢰인이다 보니, 많은 보수를 받을 수도 없었고 보수를 받더라도 대부분 할부로 받는 실정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개업을 했던 나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여느 자영업자와 같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임하는 사건이 적은 달에는 직원 인건비와 임대료를 제하고 나니 집에 가져가야 할 생활비가 남지 않았다. 찬 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나로서는 무언가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마침 당시 법원에서 모집하던 개인파산관재인 풀(Pool)에 지원했다. 당시만 해도 선배 변호사들은 그다지 폼 나지 않는 관재인 업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듯한 법조 경력이 없었던 내가 파산관재인으로 선정될 수 있었고, 다행히도 지금까지 나는 파산하지 않고 파산관재인으로 일 해오고 있다.
나는 파산관재인으로 6년째 일하면서 파산 선고를 받은 채무자들을 만나오고 있다. 처음에야 달랐겠지만 직업인으로서 나는 이제 채무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 채무자들의 쓰디쓴 실패담과 후회, 경제적 재기를 위한 다짐에 눈시울을 적시는 날도 있지만, 그다음 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차를 팔고 보험을 깨서 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갚고 있다.
2021년 3월 2일 오후 2시. 봄 햇살과 허름한 채무자들의 대비가 선명하던 법정 앞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리는 채무자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 한 채무자의 담담하지만 결연한 진술서를 읽으면서 불현듯 내가 하는 일의 결과가 아닌 과정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빚은 하나의 숫자로만 기록되지만, 빚을 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은 각자의 지문처럼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었다. 내가 할 기록은 그동안 파산관재인으로 일해 오면서 겪은 '채무자'라고 불리는 불행한 사람들의 기록이자, 앞으로 불행히도 채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록이 될 것이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의건 타의건 간에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요소와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며, 그 선택에 따라 삶은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신청인은 과거에 자신의 힘든 현실을 원망하며 옳은 길이 아닌 쉬운 길을 선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신청인의 삶은 자신이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빚으로 떠안게 되었으며, 현재 옳은 길을 가고자 하여도 그 빚에 눌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신청인의 지난 20년은 어둡고 습한 시궁창 같았지만, 남은 시간만은 환하고 행복한 초원을 거닐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 어느 채무자의 진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