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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Dec 19. 2019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

#사적인영화39: 그는 최초의 사람, 나에게 생명을 준 친구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2월 26일 개봉 예정) 




조선만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 싶어 했던 세종대왕과 장영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영화 <천문: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세종대왕이 탄 가마 안여(安與)가 부서지면서 시작된다. 실제 세종 24년 발생한 '안여사건'은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라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장영실은 곤장 80 대형에 처해졌고, 이후 그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진호 감독은 장영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은 그 빈틈이 흥미로웠으며, 그들의 관계가 왜 틀어졌고 왜 갑자기 장영실이 사라졌는지, 두 사람의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고 했다.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에서 장영실 편과 세종대왕 편은 자주 겹쳤다. 한 명만 빼놓고 말할 수 없는 두 천재는 각자의 영역을 뛰어넘어 각별했다. 관노 출신의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본 세종대왕은 종3품 대호군을 하사하며 신분 격차마저 초월한다. 

   



장영실과 세종대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장영실은 놀라운 업적을 남긴 발명가로서의 기능적인 천재로 기록될 뿐이다. <천문>은 이런 장영실을 세종대왕과의 관계를 통해 재해석한다. 왕과 신하, 아들과 아버지, 더 나아가 둘도 없는 친구, 두 사람의 관계는 기이하지만 세밀히 세공된 둘만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스며든다. 물론, 관계란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감정이 겹겹이 쌓여, 이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아니면 질투인지, 존경인지, 이해관계인지 모를 복잡 미묘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둘은 한결같다. 아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럴 거라고 믿고 싶어 진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유일한 사람이다. 서로가 없이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아닌 조선만의 시간과 절기의 변화를 만들고 싶었던 세종대왕에게 때마침 나타난 장영실은 북극성 옆에 나란히 빛나는 이름 모를 별과 같은 존재 그 이상이다.     






한석규와 최민식, 두 배우 없이 영화 <천문>은 논할 수 없다. 심지어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스크린은 꽉 찬다. 한석규는 세종대왕 전문 배우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미 한석규는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인자함이 아닌 예민하게 고뇌하는 군주,  세종 이도를 한차례 맡은 바 있다. "뿌리 깊은 나무를 찍을 때 세종이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장영실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생각했던 이야기를 만나 기뻤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영화도 왕의 야심과 카리스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내면 연기는 물론, 장영실에게는 천진난만 개구쟁이로 돌아가는 세종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세종의 진정한 친구는 장영실이라고 했듯, 최민식 이외 장영실을 연기할 배우를 떠오르기 어렵다. 두 사람은 <넘버3> <쉬리> 드라마 <서울의 달>까지, 좋은 짝패이자 합이 좋은 연기를 펼치며 지금도 서로의 길을 밝혀주는 절친으로 자자하다. <천문> 또한, 따로 디렉션이나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궁합이 좋았다고 말한 최민식, 두 배우가 연기한 세종과 장영실은 연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신하보다 장영실을 마음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세종대왕, 주군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은 장영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다.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일은 어렵지만 분명히 도전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글 창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사는 당시와 맞물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삼 느껴진다. 한 나라가 고유의 문자로 모두가 읽고 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대부의 반대, 명나라의 견제,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이치를 거스리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히면, 세종대왕이라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용기란,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이가 없다면 가질 수 없는 힘이다. 친구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며,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와 같은 존재다. 세종대왕에게 장영실이 용기라면, 장영실에게 세종대왕은 나를 알아준 최초의 사람이지 않을까. 





덧, 굳이 아쉬운 점이라면, 부재에 가까운 여성 배우의 역할이다. 이럴 거면 애초 처음부터 남성 배우로만 구성된 영화를 찍어도 좋지 않을까. 단지 소리만 지르는 역할은 구색 맞추기라도 의미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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