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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Apr 11. 2020

영화 <라라걸>

#사적인 영화 40: Ride Like A Girl, 당신답게 승리하라.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4월 15일 개봉 예정) 




"여자는 힘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방금 우리가 세상을 이겼네요." 
(They think women aren't strong enough but we just beat the world) 



2015년, 멜버른 컵 경기 155년 만에 역사상 최초 여성 우승자 '미셸 페인'이 직접 말한 인터뷰 소감이다.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은 실제 이날 친구와 바비큐 파티를 하며 경기 중계를 지켜봤다고 한다. 300m를 앞둔 순간, '프린스 오브 펜젠스'의 미셸 페인이 앞서고 있다는 장내 목소리에 모두가 다 같이 흥분의 열기에 휩싸여 응원했다고 한다. 반드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감독은 경기장의 미셸을 찾아가 설득하여 마침내 첫 장편 영화 <라라걸>를 내놓는다.  영화는 트리플 F 등급을 받았다. 여성 감독 연출, 여성 작가의 각본, 여성 캐릭터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조건을 충족해야 줄 수 있는 등급이라고 한다. 한편, 이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 같아 씁쓸하다. 더욱이 주연 배우 테레사 팔머는 "바로 지금 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완벽한 타이밍을 지닌 영화"라고 한 말도 의미심장하다. 바로 지금, 이런 영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말로 해석됐다. 




'나라를 멈추게 만드는 경기'라 칭하는 '멜버른 컵'은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최대 축제이자 155년 역사상 여성 참가자는 단 4 명뿐인 가장 거친 레이스이다. 미셸 페인은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생후 6개월 만에 엄마를 잃었고 그녀의 오빠 언니들 모두가 기수로 데뷔하거나 훈련사로 커리어를 지녔다. 어린 시절 미셸을 인터뷰한 방송을 보면, 기수 이외의 다른 꿈은 단 한 번도 꿔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훌륭한 기수가 되는 것, 멜버른 컵 우승자가 되는 것이 인생 목표인 셈이었다. 미셸은 어릴 때부터 아빠 '패디'의 훈련을 받으며, 2014년 심한 낙마 사고로 전신 마비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재활 치료 이후 훈련사인 다운증후군 오빠 '스티비'와 함께 멜버른 컵 우승을 준비한다. 그녀가 탄 경주마 역시 비교적 나이가 많은 6살의 '프린스 오브 펜젠스'로 승리 확률 1%에 불과했으나 마침내 멜버른 컵 우승자로 우뚝 서게 된다. 지금은 오빠 스티비와 함께 목장을 운영하며 훈련사로서 제2의 인생을 맞이한 미셸은 3200번 출전, 16번 골절, 7번의 낙마라는 기록을 세우며,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올인하는 승부사 기질을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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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페인은 혹독하게 자기 자신을 관리한다. 새벽 3시에 일어나 훈련을 시작하고 체중을 줄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아빠의 조언을 잊지 않고 충실히 따르며 말과 교감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녀의 하루 일상은 오직 목표를 향해 조련된다.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투지'와 '열정'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은 오직 최고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말이다. 컨트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단련하고 다듬어 나간다. 여자라는 이유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는다. 낙마로 큰 언니를 잃은 슬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미셸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셸 페인을 맡은 배우 테레사 팔머는 "미셸 페인이 가진 승부사 기질, 목표를 향한 헌신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같은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기쁘다"라고 소감을 표했다. 



테레사 팔머는 이미지보다 실제 영화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날렵한 움직임과 다부진 기마 자세에서 당당한 기품이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바다처럼 깊고 푸른 눈망울은 신뢰와 더불어 신념이 담겼다. 아빠 패디를 연기한 샘 닐 역시 국민 아버지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게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딸 바보의 모습을 보여준다. 홀로 10남매를 키우며 기수로 가르친 그는 자식에게 설교하지 않고 묵묵히 산책하며 대화를 통해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빠 역은 진짜 미셸의 오빠 스티브가 맡았다. 미셸의 경주마를 돌보며 경기 전, 가장 좋은 출발구를 뽑는 금손까지 지닌 그는 미셸에게는 친구 같은 형제이다. 다운증후군을 지녔으나 밝고 구김 없는 인물로 누구보다 더 세심하게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이외의 어떤 배우도 스티브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단점은 정해진 결말을 향한 보편적 감동과 다소 익숙한 설정, 평면적 인물 등장과 헐겁게 풀리는 갈등 해소 등등 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레이스를 통한 짜릿한 승리와 도전을 놓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영화 제목은 Ride Like a Girl, 여자답게 승리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나는 미셸답게, 당신답게 승리했다고 말하고 싶다.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토록 바라던 우승을 거머쥔 미셸이 홀로 대기실에 앉아 한동안 꿈쩍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승리에 도취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심호흡하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미셸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어디선가 사랑하는 말을 돌보며 달리고 있을 테니까.  





덧: 


거친 레이스의 세계에도 미셸이 입은 심플하면서 실용적인 기수복이나 일상복은 의외의 눈요기였다. 들러리 드레스나 파티복, 곳곳의 때 묻은 소품이나 인테리어 또한 빈티지한 멋이 느껴졌다. 10남매는 어떤 가족의 느낌일까.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위기의 순간이나 아프고 슬픈 시간에도 의지하고 서로 웃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부러운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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