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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모 Dec 27. 2022

그 길 위에는 사랑의 선택지가 놓여있다

비포 선라이즈(1995) & 비포 선셋(2004)

그린에게,



너도 알다시피 지난 일주일 간 나는 엉망이었어. 사실 그전부터 상태가 별로였지. 나의 불안함을 토로하다가 너마저 불안하게 만들었어. 친한 사이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편해지면 그걸 자꾸만 잊게 되는 것 같아. 오해를 풀고 우리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한 고비가 지나가나 싶었어. 이사 간 당일, 계약을 파기할 정도의 문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때 내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어. 너는 정신없는 날 다독이며 대응방법을 제시했지. 덕분에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더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어. 이 편지를 빌려 고마움을 전할게.


이제야 길고 길었던 이사가 끝났네. 헌 집을 떠나 새 집에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니, 이사는 마침표인 동시에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어. 여행도 비슷할지 몰라. 집을 떠나야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잖아. '비포 시리즈'는 여행하면 많이들 떠올리는 작품일 거야. 요 며칠 싱숭생숭했던 내 기분과도 퍽 어울리는 영화였어.



솔직히 <비포 선라이즈>만 봤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어. 유럽 기차여행길에 만난 제시와 셀린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플러팅을 날리다가 결국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는, 흔한 이야기 같았지.


그럼에도 감탄한 부분이 있다면 두 사람 사이의 텐션이었어. 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고. 비좁은 LP 감상실에서 상대방이 날 바라보지 않을 때 힐끗 훔쳐보는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설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야.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식당에서 전화통화 상황극을 하는 씬이야. 각자의 친구에게 우연히 만난 미국 남자/프랑스 여자에 대해 묘사하며 사실상 서로에게 끌리는 점을 고백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고백으로 가득 찬 영화지만 제시와 셀린이 느끼는 감정을 가장 실감했던 장면이었어. 미국과 프랑스의 거리만큼 동떨어진 상대방에게 호감이 가고, 해뜨기 전이라는 촉박한 타임어택에 두 사람은 더욱 이끌렸을 거야. 누가 이런 만남을 거부할 수 있을까?


물론 두 사람이 100% 딱 맞는 운명의 짝꿍은 아니야.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마주친 점쟁이를 대하는 제시와 셀린의 태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자라온 환경이 다르니 가족에 대한 가치관도 달라. 이렇게 부딪히는 면이 보이는데도, 당장은 실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강가를 걷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상황이지.


다음 편이 있는 걸 아는 나로서는 훗날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재회를 하게 될지 궁금했어. 내심 두 사람 모두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길 원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비포 선셋>을 보고 이 시리즈의 진가는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작가가 된 제시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셀린. 과거 대화 속에서 묻어난 성향 그대로 성장한 것 같아서 웃음이 터졌어.


제시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로 집필하고, 유럽출간투어 소식을 들은 셀린이 찾아와 둘은 파리에서 재회하게 돼. 어느덧 9년이 지나 30대가 된 두 사람. 젖살이 빠지고 주름은 늘었지만 여전히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봐. 파리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비엔나에서의 추억을 회상하지.


그러나 관건은 따로 있어. 비엔나에서 만나자던 지키지 못한 약속이 존재하지. 제시와 셀린은 “우리가 다시 만났다면 많은 게 바뀌었을 텐데…”라고 얘기해. 답은 같을지라도 이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사뭇 달라.


제시는 판에 박힌듯한 삶과 애정 없는 결혼생활로 인해 셀린과의 인연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어. 반면 셀린은 그때 사귀었더라면 지금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전 애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나도 셀린에게 동의해.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제시가 아쉬워하는 이유는 셀린과의 결말을 보지 못해서 일거야. 인생은 선택지로 가득한데 게임처럼 세이브 포인트를 두고 모든 선택지를 경험할 수 없으니, 그녀와 누릴 수 있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아까웠겠어. 그래서인지 제시는 잠깐이라도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서 괜찮다는 셀린을 굳이 데려다줘. 그러다 말싸움이 시작되지. 이들이 가보지 못한 길에는 이런 싸움도 숱하게 많았을 거야. 어쩌면 제시가 지겨워하는 결혼생활의 주인공은 셀린이 되었을 수도 있어.


결국 이들의 재회가 기꺼울 수 있었던 건 서로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놨기 때문이야. 뒤집어 생각해보면 제시와 셀린은 앞으로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영화는 그 선택에 관해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며 막을 내려. <비포 선셋>을 보고 이들이 함께 쌓아 올린 시간은 어떻게 흘렀을지가 궁금해졌어. 네 말대로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비포 미드나잇>을 보면 좋을 것 같아.



추신 -


나는 기찻길 하면 이 영화가 떠올라. 1992년 개봉한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역사 근처에 자리 잡은 휘슬스탑 카페에 얽힌 사연을 ‘에블린’이라는 여성이 전해 들으며 변화하는 이야기야. 나는 여성들의 사랑과 우정, 사회적 연대의 힘을 이 작품을 통해 강하게 느꼈어.


그럼 영화 재밌게 보길 바라며 이만 줄일게.



설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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