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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FM Jun 10. 2021

시네마틱-로맨틱 무브

짐 자무시, <지상의 밤>과 <미스테리 트레인>


글_ 허성완




 본래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옴니버스는 삶(사랑)의 형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미 <패터슨>을 통해 해버린 터라 의도치 않게 글이 좀 달라져버렸다.




ON

 우리가 짐 자무시의 영화 <Night On Earth>를 <지상의 밤>이라고 번역할 때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On'이다. 물론 '지상'이라는 말에 그것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감춰지면 애써 꺼내보지 않는 한 잘 드러나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감춰진 것을 다시 드러내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해야겠다.


 밤(night)은 땅(earth) 위(on)에 있다.


 그나저나 이것이 왜 중요한가. 왜냐하면 그의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쓰고 싶다.


 시간(night)은 공간(earth) 위(on)에 있다.


 이로써 나는 <지상의 밤>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의 구조는 단순하다. 같은 시간, 서로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나는 설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데 내가 "같은 시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계의 시간(이 용어는 베르그송에게서 빌려왔다)이 아니다. 실제로 각 도시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다르다. 시차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시간이 같은 시간(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러니까 시차가 발생하는 이유가 지구(earth)의 물리적 특성 탓임도 안다. 따라서 밤과 낮은 공간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공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공간을 넘나듦으로써 시간을 넘나든다. 짐 자무시는 이 영화를 통해 시간을 공간화하여 '다른 (시계가 가리키는=공간화된)시간'을 '동시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은 매우 '시네마틱'한 시도다. 그래서 그것은 매우 '시네마틱'하다. 영화는 동시에 벌어지는 일을 비동시적으로, 그러니까 교차편집을 통해 순차적으로 보여주는데 능하다. 관객은 분명 시간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정보들임에도 그것이 동시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안다.*




OF

 반면 <미스테리 트레인>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을 다룬다. 그것은 명백히 엘비스 프레슬리가 성장한 도시, 멤피스의(of) 영화다. 영화는  공간에서 엇갈리는 사람들을 시간을 앞으로 돌려가며 다루다가 마침내  허름한 호텔에 몰아넣는다. , 서로 다른 시간이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지상의 > 달리 <미스테리 트레인> 공간을 시간화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어떠한 공간을 경험할 , 잊기 쉬운 시간성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로맨틱'하다고 생각한다. 공간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다.  안의 냄새, 온도, 공기도 매번 다를 것이고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나아가 공간을 사람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험할 때 만약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동시적'으로 느껴진다면, 아마도 우린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 테다. 대개는  사람의 현재 모습에 사로잡히며  사람의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무관심하다.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성장한 도시의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담겨 있는 <미스테리 트레인>은, 그곳(과 그 사람)에 대한 짐 자무시의 애정으로 가득하다.

 



시네마틱-로맨틱 무브

 영화는 프레임 다음 프레임, 컷 다음 컷이라는 공간적인 배치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것은 편집을 조금만 해보았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프리미어의 영상클립들은 "공간적"으로 나열된다.) 그래서 시계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시계가 시간을 공간화함으로써 측정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그가 우려했던 건 그로 인해 우리가 시간의 질적 차이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같은 1시간으로 측정되는 60분도, 강제된 노동을 할 때와 내가 좋아하는 뭔가를 할 때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1시간은 1시간이라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즉각 이해하기 때문에 시급을 받는 일을 할 때, 되도록 적게 일하려고 노력한다. 남들보다 두 배의 진심으로 일을 해도 시급은 측정가능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다보면 시간의 질적인 부분을 잊게 되기 쉽다는 게 베르그송의 걱정이다.

 아무튼 시간의 공간화라는 점을 생각할 때, 시계가 발명된 이후 우리의 삶은 이미 '영화'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삶은 영화다. 다만 똑같은 2시간 짜리 영화라 해도 그것이 경험케 해주는 질적 시간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래서 우린 시계로 인해 삶이 '영화화'될 때, 어떤 영화를 만들까 고민해야 한다. 나는 <미스테리 트레인>에서 특히 일본인 커플이 걷는 모습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걷는 걸 보는 일이고, 제일 좋은 것은 그 사람과 나란히 걸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이 걷는 걸 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기. 그것이 영화(movie)화된 삶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행위(move)가 아닐까.*






2017에 써둔 것을 2021에 마무리함.




* 가령, <기생충>에서 캠핑을 갔던 박사장네 가족이 갑자기 돌아오자 기택과 그 식구들이 각자 그에 대한 대비를 한다. 충숙은 짜빠구리를 끓이고, 기택과 기우는 문광 부부를 지하에 다시 가두려 하고, 기정은 바닥에 널린 쓰레기들을 감추는데 그 일들은 동시에 벌어지지만 장면은 순서대로(즉, 공간적으로) 나열된다. 그럼에도 우린 그것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안다.


* 베르그송은 양적으로 측정가능한 시간으로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의식의 시간을 구분하고자 '지속'이라는 용어를 쓴다. 사랑하는 사람과 걸을 때, 뭔가가 지속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 어쩌면 짐 자무시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를 만든 것은 필연이다. 시간의 제약을 넘어선 존재인 뱀파이어가 서로 다른 공간에 살다가 다시 합친다. 그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지속'이다. 참고로 <미스테리 트레인>의 첫 에피소드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마치 남자의 목을 깨물듯한 행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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