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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Nov 14. 2023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

나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시오노 나나미 (1937~)

 시오노 나나미는 일본의 여성 작가이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이다.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에 그 중심지였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스스로 공부했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비평도 있지만, 10년간의 자료수집과 15년간 <로마인 이야기>를 매년 1권씩 출판할 정도의 대단한 집념과 끈기는 그녀에 대한 비평을 충분히 잠재울만하다. 그러면서 나를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한 가지 관심사에 꽤 오랜 시간 동안 끈기 있게 노력했던 적이 있었는지를 돌이켜보니 그동안의 삶이 후회스럽고 허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 지금부터 무언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는 위안이 공존하며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의 내용보다는 작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서 소개하기 전에 어떤 경로를 거쳐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에 다다르게 되었는지 그 사색의 과정을 잠시 공유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을 가볍게 읽었다. 가볍게 읽다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읽긴 읽었는데 제대로 읽은 것 같지 않은 찝찝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이 찝찝함을 한 방에 날릴 기회가 찾아왔다. 내가 속한 조직의 구성원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 고전서를 선정해서 매월 정기적으로 독서 토론회를 추진하라는 과업이 부여되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꼭 포함해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미래를 연구하는 우리 조직이 왜 고전서를 읽어야 하며, 그 수많은 고전서 중 무슨 책을 어떤 기준으로 선정해야 할지 막막해지면서 외로운 고민을 혼자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깊은 고민 끝에 그 해답을 찾았고, 이를 보고서에 담아 의사결정권자로부터 승인받았다. 결심권자에게 보고하고 승인받는 과정에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라는 책을 추천받았다. 이왕에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한번 흠뻑 젖어보자는 생각으로 폴커 라인하르트 교수가 집필하신 <마키아벨리>, 김운찬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군주론>, 신동주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군주론>, 김상근 교수님의 <마키아벨리>도 함께 주문했다. 다섯 권의 책 중에서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는지 또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를 가장 쉽게 설명해준 책이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절대로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나는 위대한 친구 하나를 소개받았다는 기쁨에 전율이 감돌았다. 500년 전에 돌아가신 친구이지만, 살아있는 교육을 세상에 해주고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생함이 잘 느껴졌다.


 크게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마키아벨리가 그동안 무엇을 보며 자랐고, 2부에서는 그가 직에 있으면서 무엇을 하였고, 마지막 3부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비록 마키아벨리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 중세 유럽과 이탈리아의 상황은 그야말로 버거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고뇌의 깊이와 치열했던 인생은 결코 짧은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살아온 굴곡진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이탈리아식 춘추전국시대를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당시 이탈리아를 보면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어쩌면 앞으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살벌한 경쟁과 갈등이 무한 반복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해보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의 일생을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토대로 소개해볼까 한다.


 제1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1469~1498)

 1부는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부터 29세의 나이로 공직에 나간 1498년까지 29년 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국내외 정치적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유년 시절을 보낸 이탈리아는 밀라노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로마 교황령,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분열되어 세력 다툼이 치열했던 시기였고, 국내적으로는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메디치 가문과 파치 가문 간의 갈등이 고조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마키아벨리의 흔적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지만, 르네상스가 꽃을 피우던 시절이라 이탈리아 국내외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마키아벨리의 세계관 형성 과정과 그 계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사건과 여러 명의 인물이 있지만, 그중에서 마키아벨리의 성장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는 사건과 인물 몇 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파치가의 음모(1478년, 마키아벨리 7세). 부활절인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에서 메디치 가문 2명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나 로렌초 메디치의 동생 줄리아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권 탈취에 실패한 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되었고 테러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가차 없이 처형당했다. 주모자로 밝혀진 살비아티 추기경은 효수(梟首,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다는 형벌)를 당하고, 이에 분노한 교황은 피렌체와 2년간 전쟁을 치르기까지 한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작에서 파치가의 음모 사건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로렌초 데 메디치의 사망과 교황 알렉산드로 6 즉위(1492년, 마키아벨리 23세). 이탈리아의 역사는 메디치가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그중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서막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 덕분에 피렌체인들은 그가 죽는 1492년까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고,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싹을 잘라버리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나라를 위대하게 만드는 데 모든 관심을 쏟은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로렌초 데 메디치가 통풍으로 고생하다가 1492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마키아벨리는 23세였다. 꽃의 도시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부로 성장하고 융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업적과 통치술은 분명 젊은 마키아벨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군주론>에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로렌초가 사망하고 몇 달 뒤 보르자 가문 출신의 인물이 새 교황으로 즉위한다. 알렉산드로 6세로 교황에 즉위한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1431~1503)이다. 알렉산드로 6세는 역사상 가장 추악한 교황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던 마키아벨리에게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즉위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때론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행위도 감수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이 바로 <군주론>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체사레 보르자이다.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은 이 책의 제2부에서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의 침공과 메디치 가문의 추방(1494년, 마키아벨리 25세). 1494년 스물네 살의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한다. 자국 군대가 없던 피렌체는 강력한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켜만 봐야 했다. 피렌체의 군주 피에로는 샤를 8세를 만나 피렌체가 프랑스의 군대에 항복할 테니 피렌체 영내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친다. 피에로는 성공적인 협상을 축하하는 의미로 피렌체 시민들에게 빵과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피렌체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시민들을 위협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은 자연스럽게 피에로로 향하고 있었다. ‘포폴로, 리베르타(민중, 자유)’를 외치며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함성이 거세지자, 피렌체 정부는 급기야 피에로 데 메디치의 목에 현상금까지 내걸게 된다. 결국, 피에로 메디치가 추방되면서 메디치 가문도 피렌체에서 함께 쫓겨난다. 다시 말해,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셈이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산마르코 수도원 출신의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였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화형(1498년, 마키아벨리 29세). 사보나롤라는 당시 로마 교회의 타락과 피렌체의 부패 정치를 비판하며 곧 이를 심판하기 위한 ‘신의 칼’이 내려올 것이라는 설교로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황과 깊은 갈등에 빠지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침공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설교로 대중들의 지지를 얻은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1497년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치품을 불태우는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1495년에 결성된 신성동맹(교황 알렉산드로 6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은 결국 1496년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친프랑스 노선을 취했던 사보나롤라의 영향으로 피렌체는 당연히 반프랑스동맹인 신성동맹에 가담하지 않았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피렌체는 동맹에 참여한 교황, 베네치아, 밀라노, 독일(신성로마제국), 스페인(에스파냐)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피렌체로부터 독립하고 싶어 했던 피사까지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경제 상황도 좋지 않아 메디치 은행이 파산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는 알렉산드로 6세는 로마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던 사보나롤라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보내지 않으면 피렌체 시민의 재산을 강탈하겠다며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보나롤라가 속해 있던 산마르코 수도원과 경쟁 관계에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누가 진정한 신의 예언자인지 불의 심판을 통해 가려보자는 도전장을 내밀자 피렌체 시민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1498년 불의 심판을 열기로 하고, 불을 피운 장작더미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을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 비가 내리는 바람에 불의 심판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보나롤라는 이를 자신의 심판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계시라며 시민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주변국의 견제와 교황의 압박 그리고 피렌체 경제의 악화로 자기 재산을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던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사기꾼이라 욕하며 감옥에 가두고, 화형 시켜버린다. 29세의 젊은 마키아벨리는 이 모든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프랑스의 침공과 메디치 가문의 추방, 그리고 이어진 사보나롤라의 화형까지 4년에 걸쳐 일어났던 격변의 시기를 지켜본 마키아벨리는 곧이어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제2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했는가? (1498~1513)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지 1달 후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진출한다. 2부는 명문가 출신도 아닌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관이 임명되어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한 1498년부터 파면당한 1513년까지 15년간의 마키아벨리의 전성기 시절을 다루고 있다.


 용병을 고용한 피렌체의 피사 점령 실패(1500년, 마키아벨리 31세). 1500년 피렌체 공화국은 용병을 이끌고 전략적 요충지인 항구 도시 피사 점령을 시도했다가 실패한다. 피사는 11세기 말 제노바(Genova), 베네치아(Venezia), 아말피(Amalfi)와 함께 이탈리아의 4대 해양 강국이었지만, 점점 몰락하기 시작해 1406년부터는 피렌체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494년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계기로 피렌체로부터 독립했다.

 피렌체는 피사 점령에 실패한 용병대장을 처형하고, 피사를 다시 공략하기 위해 프랑스에 도움을 청한다. 프랑스 루이 12세는 자신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을 피렌체가 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피사 점령의 승기를 거    의 다 잡은 스위스 용병은 피사 내부로 진격하기 직전에 본국으로 그냥 돌아가 버린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자국 군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경험한 사건이었다.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1502~1505년, 마키아벨리 33세~35세).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은 마키아벨리에게는 인생의 변곡점과 같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로마냐 공국의 발렌티노 공작이었던 체사레 보르자와 1502년부터 3년간 딱 세 번 만난다. 첫 만남 당시 마키아벨리는 33세, 체사레 보르자는 27세였다. 외교관 신분으로 종횡무진 활동하던 마키아벨리는 용병 비용 협상을 위해 체사레 보르자와 우르비노에서 첫 만남을 갖는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체사레 보르자는 매우 훌륭한 군주이지만, 그가 이룬 무서운 승리는 완벽할 만큼 행운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두 번째 만남은 이몰라(Imola, 로마냐 공국의 임시수도)에서 이루어지는데 거의 3개월에 걸쳐 만나게 된다.

 첫 번째 만남에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행운에 의해 훌륭한 군주가 되었다는 평가는 적중했다.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는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드로 6세였는데,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새 교황으로 취임한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Ⅱ, 1443~1513)가 취임했다. 율리우스 2세는 보르자 가문과 철천지원수 관계였다. 율리우스 2세는 체사레를 위험한 인물로 지목하고 감옥에 보내는 등 급격히 몰락해 가는데, 마키아벨리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고, 무자비한 술책으로 권력을 유지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체사레 보르자도 권력에서 쫓겨난 것이다. 첫 만남에서 마키아벨리가 했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막시밀리안 황제와의 협상(1508년, 마키아벨리 39세).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마뉴(742~814)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 왕관을 받은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직접 받는 대관식은 열리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라는 신성한 임무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자,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수여 받는 대관식을 개최하고자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로마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곳이 피렌체였기에, 피렌체는 막시밀리안의 군대가 방향을 바꾸어 피렌체를 점령할까 봐 두려웠다. 왜냐하면,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는데, 피렌체는 친프랑스 노선으로 프랑스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막시밀리안 1세의 진짜 의중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특사로 보낸다. 마키아벨리의 예상대로 막시밀리안 황제는 유약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막시밀리안 황제의 약점을 간파한 마키아벨리는 황제의 압박에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전략을 쓴다. 마키아벨리의 판단대로 막시밀리안 황제는 피렌체를 점령하지도 않았고, 교황으로부터 황제 왕관을 받지도 못한 채 본국으로 쓸쓸히 돌아갔다.


 피렌체 정규군 창설 및 피사 탈환 성공(1509년, 마키아벨리 40세). 1502년 마키아벨리는 꿈꿔왔던 피렌체 정규군 창설에 필요한 예산 획득에 성공했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506년에 드디어 400명 규모의 피렌체 정규군을 창설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정규군을 이끌고 1509년 피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공들여서 만든 피렌체 민    병대는 1512년 교황과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있던 메디치의 군대에 의해 해산된다.

 메디치 가문의 복귀와 마키아벨리의 파직(1512년, 마키아벨리 43세). 피렌체 공화국은 메디치 가문을 빼놓고는 서술이 안 될 정도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공직 생활을 시작할 때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쫓겨난 시기였다.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교황이 스페인과 동맹을 맺게 되는데, 친프랑스적이었던 피렌체는 교황이 고용한 스페인 용병군에 의해 유린당하고, 스페인에 머물러 있던 메디치 가문이 이틈을 타 피렌체로 복귀한다. 메디치 가문이 1512년 여름 피렌체를 장악하게 되자, 반메디치 정권에서 일했던 인물들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마키아벨리도 그 소용돌이를 피해질 수 없었다. 제2서기관직에서 파면당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음모에 연루되어 가혹한 고문과 벌금형까지 받으며 피렌체에서 쫓겨난다.   


제3부. 마키아벨리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3부는 물러났던 피렌체 가문이 재집권하자 파면당한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재개를 노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처절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1527년까지 14년의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군주론의 탄생(1513~1515, 마키아벨리 41세~43세). 한순간에 직장을 잃어버린 마키아벨리는 들끓는 분노를 억누르며 산탄드레아 산장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저자는 이러한 분노의 산물이 바로 <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주론>의 집필 시기는 정확하진 않지만, 공직에서 쫓겨난 1513년부터 1515년 정도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파면당한 것도 모자라 10년 치 월급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야야 했고, 자신이 매일 출근하던 정청 출입도 금지당하고, 투옥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이 시기에 마키아벨리는 그의 절친이었던 프란체스코 베토리(Francesco Vettori)와 43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베토리와 주고받은 편지 중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이를 메디치가의 줄리아노에게 바치는 것에 대한 베토리의 의견을 물어본다. 마키아벨리는 이어서 “이 논문(군주론)을 읽으면, 내가 15년 동안 자지도 않고 놀지도 않고 정치의 기술을 연구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인데, 이런 경험은 누군가가 유용하게 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토리와의 왕복 서한은 1515년 1월 31일부로 끝난다. 복직의 소원을 담은 <군주론>이 메디치가의 로렌초에게 전달은 되었지만, 로렌초는 단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을 번역한 오정환은 시오노 나나미와의 인터뷰 내용을 수록한 책 뒷부분에 그녀의 집필 계기를 소개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인터뷰에서 산탄드레아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산장을 방문했을 때 멀리 피렌체의 상징인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 눈에 들어오자, 관직에서 쫓겨난 40대의 마키아벨리가 느꼈을 분노가 밀려오는 순간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쓰기로 결심했고, 책 제목도 그때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마키아벨리가 거닐었던 삶의 현장들을 발로 밟아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집필했다는 생생함이 강하게 전해졌다.


  젊은 제자들(1516~1522, 마키아벨리 44세~50세). 제3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마키아벨리가 오리첼라리의 정원에서 만난 젊은이들과의 이야기다. 자신보다 약 25~26살 아래의 명문가 집안의 젊은이들과 정원에서 만나 어떠한 정치적 이해관계 없이 자유롭게 토의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만난 젊은이들은 모두 명문가의 자녀들이었다. 이 모임을 오리첼라리 정원의 모임 또는 루첼라이 정원의 모임이라고 부른다. 루첼라이는 당시 피렌체를 대표하는 명문가 중 하나로, 오리첼라리 정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공직에서 물러난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해서 누구의 초대로 이 모임에 초대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다양한 추측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마도 <군주론>의 필사본이 여러 곳에서 읽히기 시작하자,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어느 명문가의 자녀가 마키아벨리를 모임에 초대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모임이 시작된 지 2년 후 쿠데타 음모가 드러나면서 마키아벨리는 또다시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다.


  르네상스 희극의 걸작 <만드라골라> 저술(1518년, 마키아벨리 46세).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라고 부른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518년 마키아벨리는 <만드라골라> 라는 희극을 쓰게 된다. 만드라골라(Madnrogora)는 당시 유럽에서 널리 쓰이던 약용식물의 열매로 성적 욕망을 유발하는 최음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만드라골라>는 당시 큰 인기를 누리며 이탈리아 전역에 연극으로 상연되기까지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군주론>의 저자로 부르지 않고, <만드라골라>의 저자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위대한 사상가이자 근대 정치철학의 시조로 불리던 마키아벨리가 유명 코미디 작가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왜 이런 희극 작품을 썼을까? 그 이유를 난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찾아본 여러 편의 논문 중 그럴싸한 이유를 제시한 논문을 찾았는데, 논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군주론>이 정치적 주목을 받지 못하자, 희극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사상을 전파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만드라골라>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장지연, 2016).

 

 <만드라골라>는 미모를 겸비한 판사의 아내를 유혹하고 그녀의 남편을 속이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실행하는 이야기이다. 루크레치아라는 미모의 여인은 정숙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고, 판사인 그녀의 남편 니시아 또한 만드라골라라는 가짜 약을 먹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속임수에 넘어갈 정도로 자식을 갖기를 원했다. 약을 먹고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야만 임신할 수 있다는 궤변에 속아 넘어간 루크레치아는 결국 칼리마코라는 젊고 잘생긴 청년과 황홀한 밤을 보내게 된다. 이는 모두 칼리마코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한 계략이었지만, 그날 밤 이후 루크레치아는 욕정에 몸부림치는 타락한 여인으로 변신한다. 이 장면에서 당시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만드라골라>라는 희극 작품에 열광했다고 하는데, 어느 부분이 웃음 포인트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삼류 소설 작품으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당대 최고의 희극작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책 밖으로 나오며) 나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깨달았는가?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읽는 내내 그의 흔적을 따라가는 이탈리아 여행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관광지로도 유명한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도시를 감상하는 것뿐 아니라, 도시 속 숨겨진 굴곡진 역사를 체험하는 희열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마키아벨리가 과연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낙관과 희망에 기반한 이상주의자인데,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마키아벨리와 친구가 되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으로부터 이어지던 전통적인 윤리와 도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인물이다. 도덕적인 군주상이 더 친숙한 동양인이 받아들이기에는 거북한 그의 사상들이 불편하게 들려오는 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마냥 부정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솔직히 말하면 마키아벨리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과 냉혹한 정치 현실을 통찰한 마키아벨리를 만나면 나의 가치관이 한없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오히려 나의 가치관이 더 단단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노련한 뱃사공이 거친 파도를 만나면 더 단련되듯이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분명 마키아벨리를 많은 사람의 좋은 친구로 만들어준 고마운 분이기도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일생을 작가 특유의 서술을 통해 각자의 가치관을 더 단단히 해주고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더 깊게 할 수 있게 해준 분이기도 하다. 책 표지를 넘기면 아무런 글씨도 그림도 없는 빨간색 페이지가 나온다. 마키아벨리의 치열했던 삶과 피로 물든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빨간색 빈 공간에 나는 감히 마키아벨리와 친구가 되었다고 적었다.

    

 단테가 추방되지 않았다면 <신곡>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에게 혹독한 실연이 없었다면 <군주론> 또한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단테와 마키아벨리에게는 불운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행운이고, 그들에게는 위기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이처럼, 그 시대의 지배적인 상식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상적 도전을 시도하여 그 유물을 활자 형태로 우리에게 남긴 인물들에게는 언제나 시련과 좌절이 그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나에게 바꿔보자. 과연 나는 지금 어떤 모순에 직면해 있고, 주변으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고 있으며, 나를 둘러싼 환경은 나에게 어떤 제약과 고통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모순과 비난, 제약과 고통 앞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런 고민과 질문을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언젠가 후회는 남을 것 같다. 후회 없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고전을 읽고 나를 돌아보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옳다고 믿는 결정을 하고 실천하는 방법일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한 권만 읽고 그의 사상을 지금의 시대적 현실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은 자칫 왜곡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로마사 논고, 정략론, 만드라골라,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나의 생애 등 그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보면서 입체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입체적 평가를 할 의무는 전혀 없다. 다만, 제대로 군주론을 읽어보고 싶고, 지성인으로서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와 반경을 넓히고자 한다면 그 대상에 대한 입체적 평가를 하기 위한 지적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의 일생이 나에게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읽은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개인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삶보다 그의 일대기를 쫓아 평생을 바친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자극제가 되었다. 과연 나의 마키    아벨리는 누구인가? 아직은 세종대왕이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마키아벨리에게 품었던 동경의 마음을 담아 책으로 집필할 정도의 실천은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동경하는 대상이 살아온 묵직한 삶을 탐구하며 깨달은 바를 실천하는 방법도 있지만, 글을 통해 그 깨달음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 방식을 나는 더 선호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동안 묵혀두었던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다시 써보겠다는 다짐을 하며 힘겹게 책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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