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 정글북에서 만난 스무 번째 진짜 - 성해나의 『혼모노』
독서모임에서 이번에 함께 읽기로 한 올해 스무 번째 책은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였다. 나는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요즘은 소설이 주는 묘한 흡입력과 여운에 조금씩 매료되고 있다. 고전 소설에서부터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접했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성장을 위해 고른 영양이 필요하듯, 내적 성장을 위해서도 불편하지만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독서는 언제나 옳다. 그러나 편식하는 독서는 결국 사고의 폭을 좁힌다. 다양한 취향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서로의 시선을 존중해주는 '정글북'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혼모노(本物), 그 이중적 의미
'혼모노(本物)'라는 단어의 본뜻은 '진짜'지만, 인터넷상에서는 반대로 '가짜' 혹은 '흉내 낸 진짜'로 사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진짜란 무엇인가", "가짜로 치부되는 것들 속에 진짜의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물음을 붙들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굳게 믿어온 신념과 절대적 가치가 돈과 욕망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냉정하게 포착한다.
문득 영화 "HER"가 떠올랐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목소리만 존재하는 그녀와의 관계는 '진짜 사랑'인가? 실체 없는 존재를 향한 감정은 진실한가? 진짜 실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그와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만난 적은 없지만 SNS로 친구를 맺은 관계들, 가짜뉴스와 허위정보에 가려진 실체적 진실들,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추천 알고리즘들—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그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혼모노』는 바로 이 혼란스러운 일상 한가운데서, 우리가 놓쳐버린 '본질'을 다시 붙잡으려는 시도이다.
#일곱 세계가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들
『혼모노』라는 큰 무대 위에서 일곱 편의 각기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매 순간 우리를 불편한 진실 앞에 세운다. 작가는 스스로 믿고 싶은 것만을 진실로 여기는 인간의 습성을 드러내며,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가치가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아역 배우를 학대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영화감독을 여전히 옹호하는 팬모임인 '길티 클럽'의 이야기다. 그들은 '진정한 팬심'이라는 이름으로 감독의 과거 의혹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고, 맹목적인 팬심으로 감독의 윤리적 결함을 덮어버린다. 감독의 결함에 대해 침묵하고, 그를 신격화하는 것이 진정한 팬심이라 믿고 있던 회원들은 영화 시사회에서 과거 논란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는 감독을 보게 된다. 주인공은 이상하게도 안도감보다 심리적 허무함이 밀려와 혼란스러워 한다.
작가는 이 집단적 열광을 길티 플래저(guity pleasure) - 쾌락과 죄책감이 동시에 작동하는 양가적 감정 구조 - 로 풀이하며 어떤 소비 행위가 정당화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균열을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나의 신뢰, 애정, 관심은 정말 진짜인가?를 다시 묻고 있다.
『스무드』는 한국계 3세 듀이가 한국과 미국 사이의 모호한 정체성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이야기다. 그는 언어와 문화의 경계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듀이는 누가 봐도 동양인의 얼굴이지만, 한국어를 거의 못하고, 한국에 대한 기억도 없다. 여기서 '혼모노'는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 즉 본질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 과정이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려 했던 것처럼, 듀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혼모노』는 30년 차 무당 문수의 이야기다. 자신을 지탱하던 신이 떠난 뒤, 젊은 무당 신애기의 등장을 지켜보며 문수는 스스로가 '진짜 무당'이었는지 의심하게 된다. 신앙은 흔들리고, 권위는 무너진다. 작가는 여기서 진짜 신앙이란 외부의 증거가 아닌 스스로의 내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진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위가 욕망에 의해 무너질 때, 그 허망함은 신성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작품 속에는 날카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직설적이지만 강렬한 이 한 마디는, 본질을 외면한 채 겉만 따라 하는 허구의 약점을 제대로 찌르고 있다. 이는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국가경영은 세종처럼』 서문에서 우리 학계의 세컨핸드 지식병을 비판하며 했던 일침과 맞닿아 있다.
"원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원전에 대한 타인의 구라를 가지고 다시 구라를 피우는, 재탕의 재탕 지식만 악순환하는 악폐가 확산되어 있다."
진짜를 마주하지 않고 흉내만 내는 것. 본질을 건너뛰고 표면만 좇는 것. 이는 비단 학문의 영역만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혼모노』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원본 없는 모방, 실체 없는 권위, 진정성 없는 믿음—그것들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속이고, 우리 스스로를 속이게 만드는지를. 그리고 속임을 당하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우호적 감정』에서는 지역 재생 스타트업 직원들과 귀촌인들이 부딪히며 관계의 민낯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우호적 감정'을 유지하지만 그 속에는 이해득실과 불신이 뒤섞여 있다. 이 이야기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위선의 구조를 해부하며, 진짜 우호란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잉태기』는 임신한 자식의 원정 출산을 앞둔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중심이다. 두 사람은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식을 위한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숨은 것은 통제와 소유의 욕망이다. 진짜 사랑이란 간섭이 아닌,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일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일깨운다.
『메탈』은 고등학교 시절 메탈 밴드를 함께 했던 세 친구가 각자의 현실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청춘의 열정은 사라지고, 이상은 현실의 무게에 눌려 가벼운 존재로 변한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한 기억 속 음악은 여전히 존재한다. '메탈'의 '혼모노'는 타협 속에서도 지켜내려는 순수함, 즉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당연히 여긴 것들—믿음, 직업, 공간, 관계, 예술—이 얼마나 취약하게 세워졌는지를 폭로한다.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권력, 자본, 관습에 의해 구성된 허상일 수 있다는 비판적 시선, 그리고 그 취약함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짜'가 아닐까 하는 역설적 물음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라는 단편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파문을 남겼다. 이 이야기는 나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고, 어느새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구의 집 : 갈월동 98번지』가 남긴 울림
70년대 서울 용산(남영동)에 지어진 '경동수련원'은 사실상 고문의 일상이 배어든 서슬퍼런 장소이다. 정부로부터 건축 설계를 의뢰받은 여재화 교수는 3층을 설계하던 중 자신을 보조할 부려먹기 좋으면서 무난한 제자를 찾게 된다. 건축은 인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으로 설계를 진행한다. 평범한 줄 알았던 제자가 섬뜩할 정도로 잔혹한 설계를 완성하자, 교수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빼고 제자 '구본승'의 이름만 설계자 명단에 올린다. 세월이 흘러 구본승이 '경동수련원'을 다시 찾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내가 이 작품을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슬픈 단면,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단순함과 나약함,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감옥 '판옵티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순히 과거의 폭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구본승이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가 다시 창을 내는 게 좋겠다며 180도 달라지는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한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건가? 그것도 '인간을 위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 말이다.
제 생각에, 이 공간에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조사자가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고 자칫 비명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거죠?"
세련된 외관 아래 감춰진 폭력의 흔적—이 작품은 기억을 지우는 도시의 위선과 권력의 욕망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겉으로 보이는 진짜가 아니라, 지워진 목소리 속에 깃든 진실이야말로 본질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는 것의 근원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되묻는 이 장면들은, 오래도록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책 마지막에 등장하는 성해나 작가의 아래와 같은 작가로서의 다짐은 참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부엉이는 성급히 날아오르지 않는다. 날갯짓을 하기 전 충분히 주변을 살피고, 신중히 방향을 정한 뒤 착지한다. 나 역시 예리한 발톱으로 문장을 낚고, 느린 시선으로 사회의 아픔을 포착하며 열린 귀로 멀리 떨어진 이들의 이야기까지 경청하고 싶다.
이 작품은 그런 다짐의 산물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작품들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래서 성해나 작가의 다른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진짜 작가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글이란 어떤 진짜 어떤 글이어야 하는지를 성해나 작가를 통해 깨닫고 싶어졌다.
#진짜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이고, 완성이 아니라 태도
책 속 한 구절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확신이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보게 된다. 흔들리는 바닥을 밟고 서 있던 발끝이 어떠했는지를.'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내 삶 속 여러가지를 어지러울 정도로 돌아보았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가치, 내가 기대온 관계, 주변에 비치고 있는 나의 모습. 그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나만의 진짜'였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이 단지 반짝이는 표면에 불과했을까.
진짜는 결코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에 충실하려는 끝없는 시도, 의심과 자기성찰의 과정 그 자체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통해 진리를 찾았듯, '혼모노'의 인물들도 각자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믿는 진짜를 되묻고 있을 것이다. 돈과 욕망이 신념을 무너뜨릴 때, 남는 것은 허망함이다. 그러나 그 허망함 속에서도 다시 본질로 돌아가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
그 의지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짜 '혼모노'일지도 모른다. 영화 "HER"에서 테오도르가 사만다라는 실체 없는 존재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했듯이, 혼모노를 통해 우리도 흔들리는 진짜 앞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존나 흉내만 내던 이들이 진짜를 만나면 부정과 회피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진짜를 만나면 겸허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짜로 얼룩진 일상 속에서 본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진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질문하고, 의심하고, 되돌아보고,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반복 그 자체가 우리를 진짜에 더 가깝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진짜는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이며, 완성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불편함 속에서 솔직해지기
브런치에 이 글을 쓰며, 나는 작가가 남긴 물음을 떠올린다. 문학은 단순히 위로하거나 즐겁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문학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 솔직해져야 한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그렇게 나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나를, 내 세계를, 내 믿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했다. 『혼모노』는 무너진 믿음 위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인간의 내면을 비춘다. 작가는 말한다. 진짜는 결코 완성된 상태가 아니며, 본질에 충실하려는 끝없는 시도 그 자체가 '혼모노'라고.
그리고 나는 아직, 그 물음의 끝에 닿지 못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도 '진짜'라는 말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진짜를 향한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혼모노는 그 끝나지 않을 여정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서 있는 발밑을 다시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