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아야 함’이 벌이 되지 않는 곳
오늘 새벽엔 내 방에 뱀파이어 슬기 씨가 찾아왔다. 뱀파이어를 만날 때 겁이 나는 건 그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가 아니다. 나도 그에게 물려서 그처럼 죽지 못하고 영원히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한국에서는 뱀파이어들의 출국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으니 영영 태국으로 갈 수도 없겠지. 낯선 공항 라운지에서 일기 쓰면서 보내는 시간을 두 번 다시 맞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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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머물면 혼자임을 쉽게 들켜버리고 만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더욱 그럴 것이다. 태국에서 머물 때 나는 이방인이지만 그 누구도 나를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태국보다 한국에 머물 때 더욱더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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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쉽게 들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내가 태국에서 뱀파이어를 만난 건 람부뜨리 골목 끝 칵테일을 파는 노점에서, 크라비 타운에 있는 게 동상 앞에서 그리고 러이의 호텔 수영장과 콘캔 대학교 앞 일식집에서였다. 어떤 뱀파이어는 나이 든 모습이었고 어떤 뱀파이어는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직업과 성별도 제각각이었는데 어떤 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커터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을 벌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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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에 태어난 나는 겨울을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혹독한 날씨를 견디는 것이 힘들어졌다. 지나치게 고독한 인간들의 몸속에는 뱀파이어의 피가 흐른다. 나는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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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서는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이 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