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넛 청년과의 악연
세이셸은 햇살로 인사한다.
낮잠을 잘까 했는데,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견딜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베기나 보자, 하는 햇살이었다. 굴복할 수밖에 없는 눈부신 햇살이었다. 방 앞 쪽에 통유리로 되어 있는 문은 해변을 향해 나 있고, 뒤쪽 현관문은 로비부터 시작되어 이웃 빌라들을 연결하는 오솔길로 이어졌다. 신랑과 손을 잡고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따뜻했다.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깨끗한 공기가 바람에 살랑, 실려왔다. 아주 조금씩 숨이 트였다. 길가에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음악이 흐르듯 가볍고 경쾌한 새들의 지저귐이 울렸다. 간간이 우리를 스치는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기에, 우리도 즐겁게 화답했다. "Hi~!"
안녕, 세이셸!
이제야 정식으로 세이셸과 인사를 나눈다. 딱딱하고 차가웠던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풀어졌다. 경쾌했지만, 누구 하나 서두는 법이 없었다. 슬로우 비디오처럼 물속을 느리게 부유하며 속삭이는 커플들, 아빠 등에 업혀 수영하는 아이들, 물가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이어폰을 끼고 책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어느덧 우리도 그 안에 풍덩 빠져 시간과 속도를 잊은 채 흘러 다니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그림 안으로 쏙 들어가 그들과 같이 피사체가 되어 풍경 속에 둥둥 떠다녔다.
배를 좀 채우고 수영장을 떠다니다가 가까이 보이는 해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다, 하늘, 나무-
색상, 소리, 촉감-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해변은 수영장보다도 인적이 드물고 조용했다. 소음, 사람, 의무, 책임에 끼여 살던 서울 사람 둘은 그렇게 몇 시간이나 별 말도 뜻도 없이 느슨하게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비치 베드에 자리를 잡고 한국에서 담아온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신랑이 왼쪽에, 내가 오른쪽에 누워 있었다. 아마 신랑은 그냥 누워 하늘을 보고 있던가 아니면 아예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왼쪽 먼 끝에 있는 또 다른 비치 베드에서 쉬고 있던 한 커플과 그들에게 다가가는 검은 남자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아니, 느끼고 있었다.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씩 움직이다가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는 듯하더니, 검은 남자가 뒤를 돌아 우리를 발견했다.
그는 아주 여유롭게 다가왔다. 레게 머리를 한 젊은 흑인이었고, 약간 건들거리며 자유로운 몸짓을 했다. 단, 나와 마주친 그의 눈은 아주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전히 누워있는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헬로, 프렌드, 하이, 마담' 하고 불렀는데, 팔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신랑 쪽으로 가까이 가면서- 그의 왼 손에 들린 칼(!), 아주 날카로운 칼을 보았다.
아무리 무딘 성격을 가졌더라도, 여자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탑재된 '육감'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괜찮은 남편감을 알아보는 경이로운 능력 같은 것이다. 특히 위험을 감지해내는 '촉'은 정확하고도 실용적으로 작동하곤 한다.
그는 코코넛을 팔고 싶어 했다. 손바닥만 한 칼을 쓱쓱 움직여 코코넛을 잘라 나에게 건넸다. 나는 코코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열대기후 지방에서 마시는 코코넛 음료가 그렇게 맛있다고들 하지만, 뜨거웠던 라오스에서 두꺼운 껍질을 뚫어 빨대를 꽂아 들이켰던 주스도 나에겐 그저 밍밍할 뿐이었다. 세이셸의 코코넛 맛은 어떨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내 육감은 그것을 거절했다.
거의 맨몸으로 인적도 드문 이 곳에서 거친 칼을 든 건장한 흑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서 있었고, 우리는 누워 있었다. 코코넛 청년의 눈빛, 말투, 행색, 손에 들린 칼, 이 모든 정황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는데, 나보다 훨씬 천천히 몸을 일으킨 신랑은 놀랍게도 그가 건네는 코코넛 조각을 주는 대로 받아먹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 남자 (내 신랑) 어쩌지. 심지어 맛있다며 더 받아서 나에게 전달까지 한다. 완강하게 거절했다.
순간적으로 살펴본 해변은 어느새 그렇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하늘도 까맣게 흐려졌다. 검은 사내가 다가올 때부터 신경 쓰고 있었던 저 끝에 있던 커플이 유일한 인적이었는데, 그들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내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 커플을 계속 바라보는데, 신랑에게 어마어마하게 비싼 코코넛 가격에 대해 설명하던 사내가 한 조각 더 잘라 신랑의 손에 얹어 주고는, 이제 막 떠나려는 그 커플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망설이는 그들의 돈을 받아냈다, 아니 뜯어냈다.
지금이야!
열 살 때 나를 데리고 택시를 타려던 납치범으로부터 벗어났던 찰나에 그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느낌으로 알아챘었다. 같은 생각이 번쩍 들면서,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사이렌이 온 신경을 울려댔다. 손에 잡히는 물건들을 한 번에 싹 쓸어 가방에 넣고, 깔려 있던 수건은 그대로 둔 채 신랑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숲 안쪽에 보이는 리조트 건물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도망쳤다. 저 쪽 커플로부터 돈을 건네받던 코코넛 청년이 그제야 우리를 다급하게 외쳐 불렀다.
"헤이, 프렌드! 헤이, 마담!!!"
못 들은 척, 가까스로 그를 벗어나 아까 걸어왔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혼자 수영장 근처를 정리하던 리조트 직원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안전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 해변은 프라이빗 비치가 아니므로 가끔 저런 사람이 들어와 장사를 하기도 하는데, 꼭 그에게서 코코넛을 살 필요는 없으며 조심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리조트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코코넛이 떨어져 있으니 그냥 주워 먹으면 된다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 코코넛 청년이 해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면 좋으련만, 저 예쁜 바다를 현지인으로부터 빼앗아 소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코코넛 청년에게는 오히려 우리가 이방인이지 않은가.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면서 크게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고, 세이셸에서의 첫날도 조금씩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