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의 합성’의 원리로 우리 농업을 과학적이고 자주자립의 단계로 도약시킨 이가 있습니다. 바로 ‘씨 없는 수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우장춘(禹長春: 1898~1959)박사이신데요. (중략) 우박사는 오로지 조국을 위해, 조국의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 국보급 육종학자 우장춘박사를 모시고, 그의 굴곡지고 모순된 인생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어 : 안녕하세요, 박사님. 박사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생애 대부분을 일본에서 보내셨는데요. 마지막 9년 5개월을 우리나라에 계시면서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였던 우리의 농업기술을 자립자족이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쾌거를 이루셨지요?
우장춘 : 예. 맞습니다. 1950년 내가 일본에서 귀국했을 당시 한국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일제 식민치하와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빈곤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땅은 이미 황폐화됐고 농사를 지을 종자를 제대로 생산할 기술조차 없는 형편이었지요. 내가 귀국하는 조건으로 가족 위로금 차원에서 한국에서 받은 1백만엔과 내 전재산까지 탈탈 털어 일본에서 살 수 있는 모든 채소와 꽃의 모종들을 모두 사왔습니다. 가장으로서 내 가족한테는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당시 나는 한국에 진 빚을 어떻게든 갚을 각오였고, 나를 필요로 하는데 대한 고마움도 있었습니다. (중략)
인터뷰어 : 한국에 진 빚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요. (중략)
-홍지화의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인터뷰집(nobook/ 2021)) 중에서 우장춘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