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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화 Mar 01. 2022

식민지 조국의 빛과 소금이 되고팠던 한 소녀의 꿈

콩나물장수가 된  한국 최초의 스톡홀홈대학 경제학사,  최영숙


이번 인터뷰는 여성 인권의 불모지 조선에서 안타까이 스러져간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개회기, 즉 근대로 넘어오면서 이른바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의 삶은 대략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요. 이전의 어머니의 삶과는 확연히 다른, 배울 만큼 배웠고 자유연애관과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그녀들은, 그러나 여전히 두텁고 강한 남성우월사상, 특히 엘리트 여성들에 배타적인 남성 중심적 사회에 무참히 부딪쳐 희생되었습니다. (중략)


 가장 특별했으나, 어쩌면 그 특별함 때문에 오히려 더욱 불행했던 한 비운의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최영숙(1906년~1932년 4월 23일). 한국 최초의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출신 경제학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최영숙 선생님을 소환하여 동양인 최초로 스톡홀름대학을 졸업하게 된 계기와 귀국 후 조국에서 겪은 고초 등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어 안녕하십니까? 최영숙 선생님.

최영숙 안녕하세요. 최영숙입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어 선생님의 스물일곱 해의 짧은 일생을 되짚어보면 한 자루의 촛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멋지고, 경이롭고, 그러면서도 참 많이 안타깝고요. ‘파란만장’이란 단어밖에 안 떠오릅니다. 

최 영 숙 그런가요? 어릴적에는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수재로 통했지만, 결국 내 최종 직업은 미나리, 콩나물 파는 구멍가게 야채 장수였어요. 직업에 귀천도 없고 야채장수가 나쁜 직업이란 뜻이 아니라 이 나라는 5개국 능통자,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경제학사 출신조차 발붙일 곳이 없어서 구멍가게 야채장수로 생을 마감하게 하는 묘한 재주를 부리더란 말입니다. 내가 지난 날 겪은 고초에는 여자라는, 것도 식민지 조선의 여자라는 이유도 얼마간 포함됐을 거요. 


인터뷰어 당대 보기 드문 해외 유학파셨어요. 

최 영 숙 당시 엘리트들은 일본 유학파가 태반이었지요. 나는 동양인으로서도 최초로 스톡홀름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렇다보니 그 곳 사람들이 저를 신기하게 여겨 과잉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요. 파란 눈의 사내들도 요즘말로 하면 데시를 하더이다. 한마디로 나 ‘미스 최’, 스웨덴에서 아돌프 황제의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인기 짱이었습니다. 그랬는데 조선에 와서는 찬밥신세가 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나 하고, 결국 생활고로 요절하는 신세가 됐지요.


인터뷰어 당시에는 굉장히 생소한 나라였을 텐데 스웨덴에서 유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최 영 숙 스웨덴의 저명한 여권운동가 겸 사상가였던 엘렌 케이를 만나야 한다는 열의 하나로 가치관과 신념이 비슷한 중국인 친구와 함께 스웨덴 행을 결심했지요. 엘렌 케이는 주활동무대였던 서구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선과 일본, 중국의 여성운동에는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입니다. (중략)

        --홍지화 /「한국의 역사인물 가상인터뷰집 (2021)」/ nobook/ 최영숙 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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