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1. 2024

이야기의 분해-재조립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조지 밀러 2024

 영화의 부제가 ‘매드맥스 사가(saga)’라는 것을 기억하자. 기존의 <매드맥스> 시리즈가 며칠 동안 벌어지는 짧은 에피소드를 다뤘다면, <퓨리오사>는 1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벌어지는 한 인물의 서사를 담아낸다. 특히 직전작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2박 3일 동안 벌어지는 아주 긴 하나의 카체이싱임을 떠올려 볼 때, 두 영화는 같은 주인공을 공유함에도 전혀 다른 영화로 만들어진다. <퓨리오사>가 놀라운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분노의 도로>와 같은 재료를, 캐릭터·배경·설정·액션 등의 구성요소들이 거의 동일함에도 전혀 다른 성격의 영화로 받아들여진다. <분노의 도로>가 충돌과 파괴의 영화였다면, <퓨리오사>는 조립과 보존의 영화다. 무엇을 조립하고 보존하는가? 그것은 자동차이자, 퓨리오사(안야-테일러 조이)의 신체이자, 황무지(wasteland)라는 세계이자, 이야기 자체다.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퓨리오사도,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도, 임모탄 조(러치 험)도 아니다. 어둠이 내린 밤의 황무지 위에 역사가(조지 셰프소브)의 모습이 잠시 등장했다 유령처럼 사라진다. 멸망해가는 세계를 묘사하는 음성들을 제외하면, 극 중 인물의 음성 중 처음 등장한 목소리 또한 역사가의 것이다. 옷과 피부에 글자를 가득 새겨둔 그는 멸망 이후의 세계를 기록하는 존재다. 포악한 디멘투스마저 그의 쓸모를 알아채고 보호하며 데리고 다닌다. 영화는 그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그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여기서 우리는 5개의 챕터로 나뉜 이 ‘사가’의 소제목을 붙인 게 역사가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퓨리오사>는 영화의 내용이 모두 끝난 이후 역사가가 기록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퓨리오사>는 <분노의 도로>보단 조지 밀러의 최근작 <3000년의 기다림>과 도리어 친화성이 짙다. <3000년의 기다림>은 어떤 영화였나?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지니는 현대의 서사학자 알리테아에게 3000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지니가 살아온 과거의, 이야기들의 플래시백들로 채워진다. 이 이야기들은 과거에서 현재로, 지니에게서 알리테아에게로, 그리고 지니와 알리테아 사이의 사랑으로 이동하고 이어진다. 이야기는 그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지니의 말을 통해 사랑이라는 테마로 조립되어 알리테아에게 가닿는다.      

 <퓨리오사>라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방식도 이와 동일하다. 그것은 영화의 첫 시퀀스라 할 수 있는, 어린 퓨리오사가 납치되고 어머니 메리 조 바사(찰리 프레이저)가 납치범 일당을 추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메리는 추격을 위해 부서진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죽은 바이커족의 옷을 훔쳐 입는다. <분노의 도로>에서는 한 차례도 묘사된 바 없던, 황무지에서 파괴된 것들이 어떻게 부품으로써 (재)활용되는지에 관한 묘사가 영화 시작 5분이 채 되지 않아 설명된다. 나아가 전작에서는 언급만 되었던 시타델-가스타운-무기농장 사이의 관계도 충실하게 묘사된다. 가스타운과 무기농장은 멸망하기 이전 세계에 존재했던 것들을 반복해서 활용하고 계속 소진한다. 지하수를 퍼올리는 시타델 또한 다르지 않다. 황무지의 세 요새는 가진 자원의 교환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세계를 유지한다. <퓨리오사>는 그 세계가 어떻게 조립되었는지 묘사한다. 갑작스레 그 세계에 끼어든 디멘투스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순간, 크기가 맞지 않은 바퀴를 장착한 자동차처럼 그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속에서 퓨리오사의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시타델-가스타운-무기농장의 기묘한 3권분립 체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분노의 도로>의 프리퀄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영화의 어쩔 수 없는 의무방어전이자, 적어도 <분노의 도로> 이전의 퓨리오사가 지닌 목적은 ‘녹색의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 체제전복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실상 시타델로 되돌아가 그곳을 점령하자는 계획은 퓨리오사가 맥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 아닌가?     

 물론 이는 <퓨리오사>가 모순적인 영화라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목적상 <분노의 도로>와 정반대에 놓인 영화임을 조금 더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다시 역사가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퓨리오사는 40일 전쟁이 끝나고 도망가던 디멘투스를 붙잡는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에게 복수한다. 역사가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이 복수의 판본은 다양하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의 애착 곰인형과 함께 그를 쏴버리거나, 잭(톰 버크)가 죽은 것처럼 차량 뒤에 묶어 끌고 다녔거나, 시타델의 숨겨진 수경정원에 복숭아나무의 양분으로 만들었다. 역사가는 자신이 퓨리오사에게 직접 들었다는 마지막 판본을 제시한다. 그것이 진실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그저 역사가의 말과 영화가 보여주는 바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가’는 그렇게 완성된다. 황무지의 유령 같은 존재로서의 역사가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조립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그것을 전승한다. 책과 종이가 사라지고 문자가 멸종을 맞이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펜’을 소지한 역사가는 곧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조지 밀러는 <3000년의 기다림>에서 지니의 입을 빌려 사랑과 기다림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듯이, <퓨리오사>에서는 역사가의 입을 빌려 야만의 황무지에 피어난 저항의 불꽃을 이야기한다. 이는 한편으로 <매드맥스> 시리즈는 물론 오랜 시간 조지 밀러가 영화를 만들어온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엔드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분노의 도로> 속 몇몇 장면들은, 그가 <매드맥스>의 재료들로 또 다른 무언가를 언제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음모론적 상상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