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단 글레이저 2023
홀로코스트에 관한 최초의 영화 재현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조지 스티븐스가 미국 육군 중령으로서 촬영한 <나치 강제수용소 Nazi Concentration and Prison Camps>일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2차대전 당시 프로파간다 영화를 제작한 다섯 명의 미국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다섯이 돌아왔다>를 제작하며, 그들이 제작한 영화들을 함께 업로드하였다. <Five Came Back: The Reference Films>로 검색하면 이 영화와 함께 존 포드, 프랭크 카프라, 존 휴스턴 등이 제작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 1945년 촬영되고 공개된 이 영화는 조지 스티븐스와 촬영감독 E. 레이 켈로그 해군 중령, 미국 법무장관 로버트 H. 잭슨의 증언서로 시작된다. 영화에 담긴 어떤 이미지도 조작되지 않았다는 선언이다. 영화는 라이프치히, 페니그, 오드루프, 브렌동크, 노르트하우젠, 부헨발트, 하다마르 등 2개 강제수용소와 그곳에서 벌어진 학대, 고문, 학살, 그리고 해방 등을 담고 있다. 시체의 이미지, 학대와 학살을 증언하는 피해자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질병의 흔적들. 이 영화는 전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주요한 증거 중 하나로 채택된다. 그럼으로써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증언되고, 증명되고, 기록될 수 있었다.
재현은 결국 이러한 문제와 다름없다. 하지만 질로 폰테코르보가 <카포>에서 선보인 트래블링이 자크 리베트에 의해 ‘천함(abjection)’으로 낙인찍힌 이래로,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이래로, 홀로코스트는 재현될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것만 같았다.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를 떠올려보자. 독일인이 찍지 않은 당시의 수용소 푸티지와 전후 폐건물이 된 수용소의 이미지를 교차하는 이 영화는 (세르주 다네의 말처럼) ‘공정한(justice)’ 거리를 감각하게끔 하는 영화다. 종전에서 10년이 지나 나온 이 영화는 조지 스티븐스의 영화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전략을, 10년이라는 거리를 영화에 새겨둠으로써 과거를 상기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클로드 란츠만은 엄격하고 엄밀한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지 않되 뇌리에 각인시키는 <쇼아>를 만들었고, 9시간의 러닝타임은 홀로코스트-이후의 이미지와 증언을 통해 그것을 상상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리고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있다. 영화는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잡아넣었던 작전 ‘밤과 안개’부터 수용소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들까지 모든 것을 스펙터클의 통일성 속으로 집어넣는다. 마지막으로, 네메시 라슬로의 <사울의 아들>이 있다. 수용소 내에 ‘시체처리반’인 존 더 코만도로 강제노역을 수행하던 주인공의 시점에서, 포커싱을 극도로 제한함으로써 수용소 내부를 재현하면서도 재현하지 않는 방식을 채택한다.
홀로코스트가 영화의 역사에서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가, 혹은 왜 재현되는 것은 어떠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는가에 관한 논의는 주로 이와 같은 영화들을 통해 전개되어 왔다. 물론 우리는 더 많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소피의 선택>, <랜드 오브 마인>, <바스터즈>, <조조 래빗>과 같은 영화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 논의에 뛰어든 가장 최근의 영화다. 글레이저는 (얼핏 <사울의 아들>을 연상시키는) 극도로 제한적인 방식으로 아우슈비츠를 재현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설계자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의 집을 재현하고, 담장 너머 수용소의 이미지는 재현되지 않는다. 단지 종종 들려오는 비명과 총성, 담장 위로 올라오는 소각장의 연기와 강물에 떠내려온 뼛가루와 같은 것들로만 제시될 뿐이다. 평자들은 이 영화를 두고 홀로코스트 재현에 있어 새로운 방식을 열었다는 상찬을 쏟아낸다. 홀로코스트를 직접적으로 재현할 수 없다는 어떤 정언명령, 그것을 재현하는 순간 ‘<카포>의 트래블링’의 천함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압박감, 그렇기에 선택된 ‘시각적이지 않은 재현’ 혹은 ‘시각을 일정부분 포기하는 재현’으로 이어지는 어떤 흐름들, 그 맥락들 속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가장 끝자락에 놓이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윤리적’인가? <쇼아>에 관해 고다르가 쏟아낸 비판, 결국 <쇼아>는 홀로코스트에 관해 아무것도 찍지 못했다는 비판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것을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것을 우회로를 택한다. 시야를 제한하고, 공간을 체험하게 하고,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를 통해 재현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두 영화는 겹쳐진다. 다른 한편으로, 두 영화가 택한 방식이 영화 외부의 매체를 연상시킨다. 송경원은 <사울의 아들>의 제한된 시야와 공간감의 체험이 VR을 연상시킨다 말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회스의 집을 촬영하는 방식, 특히 공간의 몽타주 대신 컨티뉴이티만을 한없이 강조하는 듯한 편집은 기술적 한계로 인해 채택된 PS1 시기의 [바이오 하자드]와 같은 호러 게임을 연상시킨다. 영화보다도 더 강력한 촉각적 지각을 가능케하는 게임의 재현방식을 두 영화는 채택한다. 물론 이것은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윤리성에의 달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오히려 이는 20세기의 절반 동안 영화가 홀로코스트의 윤리적 재현을 두고 벌인 고민이 임계점에 봉착했기에 영화 바깥으로 눈을 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다시금 고다르의 말, 그것을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조지 스티븐스의 영화가 증거로서 채택되고 알랭 레네의 영화가 보여줌으로써 공정한 거리를 가능케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며 떠올린 영화들은 앞서 언급한 영화들이 아니었다. 틴토 브라스의 <살롱 키티>와 같은 나치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 그것을 장르적 형태로 가공한 온갖 호러, 코미디, 고어 영화들, 이를테면 <데드 스노우>나 <아이언 스카이> 같이 헛웃음을 자아내는 영화들을 떠올렸다. 나치와 홀로코스트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진지한 윤리적 숙의보다는 영화 이미지의 관음적인 시각성과 말초적인 촉각성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것을 재현하는 영화들. 이 영화들은 하나의 공통감, 나치와 홀로코스트의 죄악에 대한 동의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나치는 철저히 악당이며, 조롱과 패러디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끝없이 영화 속 현재로 회귀하는 것이 된다. 그것들은 무수한 영화에서 형태를 달리하며 끝없이 되돌아온다. MCU의 하이드라를 떠올려보자. 그것은 끝없이 되돌아온다. 그러한 맥락에서 나치와 히틀러는 가장 손쉽게 채택되는 악역이 된다. 온갖 것들을 뒤섞은 <쿵 퓨리>의 악역은 나치와 히틀러였다. 가나에서 제작된 싸구려 액션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는 살아남은 히틀러와 도죠 히데키를 아프리카의 쿵푸 마스터가 때려잡는다는 내용을 담아낸다. 여기엔 앞서 열거한 영화들과 그것을 통해 벌어진 (새로운) 윤리적 숙의와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영화를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의 윤리적 동의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와 재현의 윤리에 관한 일련의 영화와 논의는 그것을 신성화하고 어떤 성역 속으로 그것을 옮겨 놓는다. 그 반대에 놓인 영화들은 그것을 우리의 앞으로 데려오고 세속화한다. 그 모든 것을 관람하는 ‘나’의 입장은 그 사이를 끝없이 오간다.
따라서 이 글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한 것이라기보단 그것을 포함한 일련의 논의에 대한 불만 표출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의 맥락을 따져 물으며 그것을 상찬하고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관한 다른 재현들을 싸구려 영화의 영역에 위치시키며 누락하는 것은 더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재현의 신성화와 세속화 사이에서, 우리는 재현되지 않는 다른 역사들을, 조지 스티븐스와 같은 이들의 카메라로 기록되어 증거로 채택되지 못했으며 재현의 논의에 포함되지 못한 어떤 것들을 이야기해야 한다. 홀로코스트 재현의 논의와 역사를 끌어와 다른 역사적 재현에 그대로 접붙이는 것이 만들어내는 오류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