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린 땅> 토마스 아슬란 2024
멜빌의 범죄영화를 연상시킨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림자 속에서>의 주인공 '트로얀'이 다시금 등장하는 토마스 아슬란의 신작. 영화는 그가 오랜만에 베를린에 들어와 그림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1년에 큰 건은 두 개 정도만 한다는 그의 '큰 건' 중 하나인 이 그림을 팔기 위해 그는 동료를 모은다. 범죄영화하면 으레 떠올리는 총격전이나 카체이싱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는 그저 건조하게, 베를린이라는 어두운 대도시를 배경삼아 벌어지는 범죄들을 묘사한다. 여기엔 범죄자 동료 사이의 의리와 배신 같은 '뜨거운' 이야기가 크게 개입되지도 못한다. 그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어둠 속에 자신의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 일정한 거주지조차 필요치 않은 트로얀의 행적을 기록할 따름이다. 다만 그것이 '초토화된 땅(Scorched Earth)'을 의미하는 제목 <그을린 땅>과 맞물려 특별한 감흥을 주진 못한다. 범죄영화의 벤션을 무시하면서 얻어지는 흥미로움도, 멜빌을 연상시킨다는 건조한 고독감도 이 영화에는 없다. 단지 대도시의 어둠과 더욱 어두운 옷차림의 사람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소녀들이여, 거센 비처럼> 수 이쉬안 2023
게임 원작 드라마 <반교: 디텐션>을 연출했던 수 이쉬안의 첫 장편영화. 1994년 타이페이의 미술대학에서 있었던 학생운동 실화에 배경을 두고 있다. 신입생 지웨이는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학과장의 눈밖에 나고 성적의 불이익을 받는다. 우연한 계기로 학과장 퇴진 및 부당 퇴학 학생의 복학을 주장하며 투쟁하는 웨이칭과 학생회장 이강을 알게 된다. 지웨이는 투쟁에 동참하게 되고, 점차 웨이칭에게 끌림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199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의 타이페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감독의 전작이 국민당 시기 벌어진 탄압을 배경으로 삼는 것과도 묘하게 연결되어 보이는 이번 영화의 배경은, 한편으로 한국의 관객에겐 익숙한 ‘운동권 로맨스’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여러 측면에서 이 영화는 전형성을 따른다. 고위 정치인의 자녀인 운동권, 정치권과의 연줄을 만들고자 하는 운동권, 온건파와 행동파의 충돌,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내분과 같은 것들이 이 영화에도 등장한다. 그 속에서의 로맨스는 보통 서로 다른 지향을 가진 두 사람이 화합하는 계기 혹은 다툼과 연대의 은유로써 등장하곤 한다. 이 영화는 지웨이와 웨이칭, 이강 사이의 삼각관계 속에서 그 은유로 작동하며, 조금 더 복잡한 관계 사이에서의 감정들을 담아낸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줄 착각했다는 지웨이의 대사는 그러한 상황을 축약하여 보여준다. 다소 안온한 결말을 맞이하는 영화이지만, 거기에 다다르는 과정의 뜨거움을 세심하게 담아내는 영화.
<에스퍼의 빛> 정재훈 2024
이 영화는 당혹감으로 가득하다. 특히 오랜 시간 정재훈의 신작을 기다려왔을 관객이라면 더욱이. <ESP>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던 이 프로젝트는 2018년 처음 시작되었다. 이능력을 지닌 '에스퍼'들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벌인다는, 일견 단순한 이야기를 지닌 이 영화는 15명의 이름이 각본가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정재훈 감독은 자신이 세팅해둔 세계 위에서 섭외한 배우들이 직접 이야기를 쓰게끔 했다. 어떻게? 트위터의 서브컬처로 자리잡은 '자캐커뮤' 혹은 전통적인 TRPG의 방식처럼 배우들이 각자 '롤'을 받고 세계의 설정과 롤에 맞추어 상황을 이어나간다. 이를 일종의 릴레이 소설이라 이해할 수도, 혹은 자넷 머레이와 이안 보고스트가 '절차적 수사학'이라 부르고 에스펜 올셋이 '에르고딕 서사'라 부르는 게임연구 및 서사연구에서의 이론들을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이론들을 곧장 영화에 적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같은 인터랙티브 무비 혹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시뮬레이터 게임과는 다르게, <에스퍼의 빛>은 그렇게 진행된 세 개의 '플레이 세션'을 영화화한다. 따라서 영화는 총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들고 이야기만들기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관객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지 않는다.
정재훈 감독은 GV에서 이들을 '배우'가 아니라 '플레이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이 영화를 일종의 다큐멘터리라 여긴다고 말했다. 물론 <에스퍼의 빛>은 각본과 연기로 채워져 있으며, 특촬물, 괴수물, 판타지 등의 장르에서 길어온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 혹은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에서나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유명사들도 그러하다. 감독이 말하기로, 자신은 몇몇 설정과 지명 등의 세계관을 플레이어들에게 주고 이야기들은 전부 그들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드러내려는듯 트위터의 UI를 가져온 텍스트를 계속 띄운다. OA(Operator Account)가 상황을 제시하면 거기에 맞추어 선택지를 고르거나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졌고,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연기와 영상으로 구현하며, 이 텍스트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영화제작에 사용되었을 트위터 계정들은 여전히 검색 가능하다(대부분이 비공개 계정이라 내용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는 정재훈의 말을 따라 <에스퍼의 빛>을 다시 생각하면, 이 영화는 '자캐커뮤' 혹은 ' TRPG'의 방식을 따라 서사가 절차적으로 생성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물론 각본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이후에 촬영이 진행된다는 익숙한 극영화의 제작방식을 따르지만, 영화는 플레이 과정을 영화 곳곳에 새겨넣음으로써 제작방식 자체를 영화 안에 포함시키려 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플레이어이자 자신의 롤을 연기하는 배우인 이들의 형상은, 마치 디지털 세계에 들어가면 옷차림이 바뀌는 <디지몬>의 '선택받은 아이들'처럼 양측을 오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흥미롭고 재밌는가하면 그렇지는 않다. 익숙한 SF 장르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기대했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배신감을 선사한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 대신 무수한 얼굴 클로즈입이 러닝타임을 채우는 1장, 끝없이 이어지는 비명소리로 가득한 2장, '컴퍼니'라는 미지의 존재에 속박된 안드로이드들이 등장하는 3장의 이야기가 딱히 연결성을 갖지도 않는다. 대부분이 첫 영화인 배우들의 연기가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정재훈의 앞선 두 영화, 감독 스스로 '4DX 어드벤처물'로 명명한 <도돌이 언덕의 난기류>와 기이한 여행영화인 <Trans-Continental-Railway>가 그러했던 것처럼, <에스퍼의 빛> 또한 익숙하게 호명되는 장르적 틀을 멀찍이 벗어나 나른 방식의 체험을 요구한다. 점점 많은 영화, 특히 액션이나 SF 등의 장르영화를 중심으로 소위 '게임적 서사'라는 것이 스며들어오는 상황에서, <에스퍼의 빛>은 주어진 세계와 이야기의 각색이 아니라 이야기의 게임적 생성이라는 실험을 시도하고 그 결과물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생성되는 과정의 기록이며 생성의 체험이다. 흔하게 상상되는 영화의 재료들을 멀찍이 벗어나 기이한 모습을 빚어내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괴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
<섀도우 오브 파이어> 츠카모토 신야 2023
10년 전 <노비>를 통해 동남아 지역으로 파병간 2차대전 당시의 일본군이 겪은 정신적 붕괴를 묘사했던 츠카모토 신야가, 이번에는 전후 붕괴된 일본의 도시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성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 전장에서 돌아와 트라우마를 겪는 남성, 도둑질을 통해 살아가는 어린 소년, 무언가 꿍꿍이를 숨기는 것만 같은 남성, 영화는 네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앞의 절반은 여성의 시점에서, 뒤의 절반은 어린 소년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영화는 소이탄 폭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불타버린 도시와 그곳에 형성된 암시장은 생존투쟁으로 가득하다. <노비>의 주인공이 군국주의의 노비이자 좀비에 가까운 상태의 인물을 그려냈다면, <섀도우 오브 파이어>는 패전을 통해 그러한 속박에서 풀려나버린 이들을 담아낸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닌 어린 소년을 제외한 이들은 갑작스레 마법이 풀린 자동인형처럼 넋이 나가 보인다. 츠카모토 신야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 일반에 관한 세심한 접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고지라: 마이너스 원>과 같은 일본 주류 영화의 흐름이 택하지 않은/못하는 곳으로 향하는 영화다. 오랜 시간 바디호러와 크리처물 등의 장르를 통해 인간성을 탐구해온 그는 장르의 틀 바깥에서 그것을 재차 생각하고자 한다. 물론 그 결과물이 퍽 새롭다거나 흥미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패전 이후의 일본에서 같은 주제를 다양항 방식으로 사유해온 이름들을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는, 여전한 박력의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감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섀도우 오브 파이어>는 그러한 지점에서 자신이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이야기하는 한 노감독의 영화다.
<죽음의 경주> 폴 바텔 1975
1979년 세계는 한번 망했고 미국은 권위주의 대통령의 지배하에 놓인다. 대통령은 권위 유지를 위해 폭력적인 스포츠 '대륙 횡단 레이스'를 만들었다. 뉴욕에서 뉴LA까지 3일간 경주를 펼치는, 누가 빨리 들어가느냐와 함께 누가 차로 사람들을 많이 치어 죽이는가가 중요한 폭력의 경기. 2000년을 맞아 열리는 대회에서 3번째 우승을 노리는 레이서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보조이자 저항군의 일원인 애니가 서로의 필요에 맞춰 협력하게 된다. 영화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설정에 걸맞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75세 이상 노인을 치어 죽이면 점수를 얻는다는 규칙이 있기에, 대회 경로 중에 놓인 요양병원에서는 안락사 대상 노인들을 도로에 늘어놓는다. 어떤 겁없는 시민들은 투우사 복장을 한 채로 경주하는 자동차를 향해 붉은 천을 휘두른다. 기상천외한 레이싱이 영화 내내 이어지고,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차에 치인다. <죽음의 경주>는 폭력의 쾌락 속에 냉소를 빼곡히 집어 넣는다. 그것은 베트남전 막바지 시점에서의 조롱적 유희로서 기능한다. 디스토피아 SF이지만, 미래에 대한 상상대신 당대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한 이 영화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유마 카운티의 끝에서> 프란시스 갈루피 2023
유마 카운티 마지막에 위치한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진 몇몇 사람들이 도착한다. 오전에 왔어야 할 유조차가 오지 않아 주유소의 기름 탱크가 바닥난 상황, 사람들은 주유소 옆 식당에서 유조차를 기다린다. 이 사람들 중엔 그날 아침 은행강도를 저지르고 도주중인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 평범한 시골 식당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도는 장르적 공간이 된다. 많은 우연에 기대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지만, 영화는 우연들이 하나의 공간에 집적되며 발생하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사실 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은 이뿐이다. 영화는 인간의 물적 욕심에 대한 탐구와 같은 것은 거추장스럽다는듯 선을 그어버린다. 남은 것은 장르영화로서의 충실성, 우연한 만남들이 쌓여 발생한 파국으로 90분 동안 달려가는 것뿐이다. 사실 그것을 잘 해내는 게 어렵다.
<하드코어: 스크린 성 해방> 존 램 1972
영화는 미국에서 하드코어 포르노 규제가 완화되던 1960년대 말의 상황을 다룬다. 그렇다고 당시의 상황을 다룬 지루한 다큐멘터리, 이를테면 포르노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사이의 대립을 공청회나 시위 등의 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의 영화는 아니다. 물론 그러한 장면들 또한 이 영화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들어 있다. 존슨 정부에서 진행된, 음란물과 관련한 연구와 위원회가 등장하고, 이들은 포르노가 무해함을 연구를 통해 입증했다고 주장한다. 그 반대편에는 이에 반대하며 성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유해하다 말하는 종교인 등의 단체가 존재한다. 영화의 내레이터는 이들의 이름과 활동, 주장을 계속 언급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을 후경 삼은, 피스톤 운동을 반복하는 성기의 미트샷이다. 영화는 1960년대 당시, 나아가 에디슨이 키네마스코프를 통해 상영했던 초기 영화사의 포르노까지, 지금의 시점에서 '빈티지 포르노'라 불릴 영상들을 끝없이 보여준다. 거기에는 교육적 목적을 가진 포르노도, 예술적 의도를 지닌 포르노도, 동성애 관계를 다룬 포르노도, 무엇보다 오락을 위한 포르노도 모두 존재한다.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인이 포르노를 본다고 해서 이상성욕을 갖는다던가 더 강렬한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문란해지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포르노를 장시간 시청하는 것은 지루함을 야기할 뿐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것을 증명하고자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노골적이며 적나라한 성행위가 계속하여 등장하는 이 영화를 보는 일은 그 지루함을 감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가 인용하는 포르노의 다양성은 포르노의 장르와 스타일, 그것이 제작되고 촬영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어떤 정보들을 제공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난다면, 에디슨 시대의 포르노와 온리팬스 시대의 포르노가 거의 다르지 않은 구도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비슷한 장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연구 자료로서 가치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타임스토커> 앨리스 로우 2024
160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시간대에서 다양한 계층의 여성으로 살아가는 아그네스는 전생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반복해서 알렉스라는 남성을 마주치는 것을 깨닫고, 그를 소울메이트라 여긴다. 하지만 그가 알렉스와 만나는 순간마다 조지라는 훼방꾼이 나타나 이를 방해한다. <타임스토커>는 여러 시간대에 걸친 인연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대, 도시, 계급, 직업 등을 배경삼지만,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SF 로맨틱 코미디적 성격을 드러낸다. 다만 그 과정이 흥미롭거나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진 못한다. 몬티 파이튼으로 대표되는 영국 코미디의 전통이 레이첼 블룸이나 에이미 슈머와 같은 미국 여성 코미디언의 성격과 뒤섞인 것 같은 <타임스토커>의 이야기와 대사에 <스위스 아미 맨>과 같은 영화 속 아날로그적 장치들을 덧붙인 것 같은 이 영화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떠올리게 하는 것 만큼이나 새롭지 못하다. 물론 다양한 레퍼런스를 떠올리게끔 하는 것이 나쁜 영화의 조건이라 할 수는 없지만, <타임스토커>의 경우엔 그 위에서 보여주어야 할 개성이나 취향이 부재하다. 애나 빌러의 <사랑의 마녀>와 같은 작품이 비슷한 재료를 통해 작가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다면, 이 영화에서는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앨리스 로우의 완력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인형의 계곡을 지나> 러스 메이어 1970
재클린 수잔의 소설 [인형의 계곡]과 그것을 원작 삼은 1967년작 <인형의 계곡>과는 관련 없는 영화라는 자막이 영화의 시작을 장식한다. 이 자막과 함께 영화는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하는 장면을 미리 스포일링한다. 원작 아닌 원작이 그러한 것처럼, 러스 메이어의 영화 또한 우연한 기회로 미국 연예계에 입성한 여성들과 그들을 둘러싼 다분히 '막장드라마'스러운 이야기를 담아낸다. 술과 담배, 약물과 섹스, 파티와 폭력이 오가는 이 영화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사건들이 벌어진다.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거장 러스 메이어가 처음으로 메이저 스튜디오인 20세기 폭스에서 작업한 이 영화는 막장극 특유의 어지러운 설정들 위에서 다양한 풍자를 시도한다. 그것은 미국 소프오페라가 으레 그러하듯 교훈적인 톤의 마무리로 끝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영화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짚어내며 그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내레이터의 보이스오버로 마무리된다. 엉망진창에 가까운 이 영화의 이야기와 이미지는 그 속에서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만든다. <빨리, 푸쉬캣! 죽여! 죽여!>나 <빅센!> 같은 독립 제작 영화들에서 보여주었던 힘을, 러스 메이어는 대형 스튜디오 작업에서도 이어간다.
<사유리> 시라이시 코지 2024
오시키리 렌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사유리라는 이름의 귀신이 들린 집으로 이사 온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때문에 영화의 초반부는 <주온>과 같은 J호러의 전형적인 하우스호러 장르처럼 다가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사건들로 인해 가족들이 하나하나 죽거나 미쳐간다. 영화는 그 순간 장르를 뒤튼다. 귀신에게 당하기만 하던 노리오와 그의 할머니는 반격을 시작하면서 <사유리>는 하우스호러가 아니라 코미디에 가까운 방식으로 변주된다. 원작 만화가 작가 특유의 기괴한 그림체에 힘입어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면, <사유리>는 이야기뿐 아니라 연기의 톤, 대사, 조명 등 다양한 장치들을 정확히 영화의 절반이 되는 시점에서 변주하며 전반부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영화 후반부를 끌어간다. 물론 그 과정이 매끄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간중간 제시되는 '떡밥'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장르적 탈주에 안정감을 더해준다. <말리그넌트>와 같은 영화들이 얼핏 스쳐지나가는, 대단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대단히 재밌는 장르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