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새 계속 뭔가 써내는 일을 하다보니 길게 영화글을 쓰기 힘들어서... 메모와 일기 사이의 무언가로 본 영화들 이야기를 짧게짧게 해보려고 한다. 물론 길게 풀고 싶은 영화는 길게 쓰겠지만... 시작은
2. <에이리언>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인만큼, 페데 알바레즈는 이 영화에 전작들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대거 집어 넣었다. <에이리언> 풍의 밀실 스릴러인 전반부와 <에이리언 2> 풍의 액션물로 이어지는 후반부,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등장한 '엔지니어' 떡밥을 이어가는 설정들, <에이리언 3>에서 제노모프가 리플리에게 얼굴을 들이대던 아이코닉한 장면의 재현, <에이리언 4> 속 뉴본 에이리언을 연상시키는 오프스프링의 등장과 최후. 어느덧 45년의 긴 역사를 갖게 된 시리즈인만큼 <로물루스>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 다만 그 긴 시간 동안 에이리언의 형상은 두려운 무언가보단 일종의 밈적 요소가 되었고,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같은 외전은 그것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한 지평 위에 리들리 스콧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프로메테우스>와 <커버넌트>가 (몇몇 흥미로운 지점에도 불구하고) 시리즈를 지속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했으며, <로물루스>가 택한 방식 또한 이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본가' 시리즈라 할 수 있는 1~4편을 다시 떠올려보자. 각각의 평가는 다르지만, 서로 다른 네 명의 연출가가 개성을 뽐내는 일종의 쇼윈도로서 <에이리언> 시리즈는 기능해왔다. 리들리 스콧의 스타일리쉬한 호러, 제임스 카메론의 강한 여성상을 뽐내는 액션, 데이빗 핀처의 상징들, 장-피에르 주네의 키치함. 페데 알바레즈의 <로물루스>에서 개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현학적인 설정으로 가득한 앞선 두 영화와 다른, 팝콘무비에 가까운 포지션을 (시리즈에 대한 리스펙을 듬뿍 더해) 채택한다. J. J. 에이브럼스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콜린 트레보로우가 <쥬라기 월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것은 시리즈의 완전한 복귀라기보단 다시금 침몰할 수 있는 계기의 마련일 뿐이다. 그렇다고 <로물루스>에 페데 알바레즈의 인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시리즈의 전통을 뒤엎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장을 섀긴다. 리들리 스콧부터 장-피에르 주네까지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임신과 강간의 공포를 근간에 두고 있으며, 그렇기에 이 시리즈의 첫 희생자는 존 허트가 연기한 케인이었다. <로물루스>는? 이번 영화에 처음 등장한, 체스트버스터가 성체 제노모프로 자라는 동안 사용하는 고치는 그 자체로 여성기를 닮아 있다. 그리고 전기진압봉으로 고치를 쑤진 비요른은 고치 속에서 튀어나온 제노모프의 꼬리에 관통당해 죽는다. 이는 페이스허거의 형상에서 비롯된 에이리언 특유의 남근적 형상보다는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를 연상시킨다. <맨 인 더 다크> 속 맹인 용병이 지하실에서 행하던 일종의 생체실험을 떠올려보자. 페데 알바레즈는 그것을 <에이리언> 시리즈 속에서 반복한다. <로물루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연출자의 개성 혹은 일관성이라면 그뿐이다. 시리즈는 흥행을 되찾았지만, 그 밖의 측면에서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
3. 추창민의 <행복의 나라>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실제 사건에 바탕한 픽션이라는 익숙한 문구를 핑계 삼아,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마음껏 선보였던 '팩션'을 이번 영화에서도 마음껏 선보인다. <광해>가 사극의 탈을 쓴 채 노무현의 말을 영화에 실어 나르려는 시도였다면, <행복의 나라>는 전두환에게 쏟아내고 싶었던 모든 말을 정인후라는 인물의 입을 빌어 쏟아내는 영화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 그리고 박태주 대령이 정인후를 변호인으로 선임하기도 이전 시점에서, 육군본부에 모여 계엄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 변호인단 등이 모인 자리 직후에 (전두환을 모티프 삼은) 전상두와 정인후 두 사람이 독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두 인물의 독대는 12.12 쿠데타의 묘사 직후 전상두를 찾아 골프장에 간 비굴한 모습의 정인후로 재차 등장한다. 두 장면은 재판 장면보다도 중요한 <행복의 나라>의 핵심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독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전상두 앞에서 지지 않고 정의감에 가득한 말을 쏟아내는 정인후를 찍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의 다른 모든 부분을 포기해도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4. 오승욱의 <리볼버>를 <무뢰한>만큼 기억에 남을 영화라 하긴 애매하겠지만, 이 영화는 분명 기억해야할 영화다. 과작의 감독이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은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 약속한 돈을 받지 못한 비리경찰이 범죄자들에게 돈을 받아내고자 움직인다는 이야기만을 담고 있다. 여기엔 어떤 숨겨진 음모라던가, 하수영(전도연)이 버림받은 특별한 이유와 같은 것은 없다. 영화는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수영의 관점을 그대로 따라, 2년 동안 그가 얻지 못한 바깥 상황의 정보들을 하나하나 얻어가는 과정을 뒤쫓는다. 2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뒤늦게 추적하기에 수영이 얻어내는 퍼즐조각들은 시간순이 아니지만, 그것은 영화의 서술 트릭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느와르 영화로서 <리볼버>가 가진 이야기의 힘은 우직하게 걸어가며 퍼즐 조각들을 맞춰가는 수영과 정윤선(임지연)을 비롯한 그 주변의 인물들이 만들어낸 리액션의 다이내믹이다. 수영의 출소는 모든 과거가 덮인 듯한 시멘트 바닥을 망치로 내치러 깨부수는 것과 같다. 물론 <리볼버>는 <존 윅>이 아니고, 수영은 존 윅처럼 처절한 복수극을 벌이지 않는다. 영화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화하고, 호텔방에서 술을 마시며, 약속된 돈과 아파트를 받기 위한 길로 차근차근 향할 뿐이다.
5.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짧게만...
<파보리텐> 루스 베커만 2024
영화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마호메드, 레베카, 다비드, 다니, 마예나... 오스트리아 빈 파보리텐에 있는 초등학교 교실의 모습을 3년여간 촬영한 루스 베커만의 신작은 튀르키예, 요르단, 모로코, 알바니아 등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온 이민자의 아이들로 가득하다. 교실에서는 독일어를 써야 하지만 가정에서는 부모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독일어에 서툰 부모와 교사의 상담은 통역해줄 가족구성원을 필요로 한다. 서로다른 국가에서, 대륙에서, 종교에서 온 아이들은 쉽게 섞이는 듯하면서도 그렇지 못한다. 가톨릭 성당으로, 이슬람 모스크로 각기 현장학습을 나가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익숙함과 어색함을 동시에 표하고, 종종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선생은 힘들어하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다양한 이민자의 2세가 뒤섞이는 멜팅팟으로서의 초등학교 교실을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방식으로 담아낸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다만 <파보리텐>은 그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10세 전후의 아이들은 하나둘씩 스마트폰을 갖게 되고, 소셜미디어를 사용한다. 영화 초반부 교사와 함께 막춤을 추는 아이들 중 누군가는 '밈'을 따라하고 누군가는 휘적휘적 몸을 움직이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넌지시 감지하게 된다. 이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서로 다른 인종과 출신국가, 종교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는 멜팅팟을 제공할 수 없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퉁쳐지곤 하는 일들은 아이들을 떼어 놓기도 하고, 가정이라는 학교와 구별되는 또 다른 세계뿐 아니라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또 다른 세계는 아이들의 뒤섞임을 어렵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는 중간중간 아이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화면을 집어 넣는다. 스마트폰은 서로가 서로를 사진적 이미지로 담아낼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도구다. 이것은 부모 등의 어른이 아이들을 촬영한 홈비디오 영상과 다르다. 단순히 아이가 카메라를 들고 있기에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본 세계와 같은 말로 퉁쳐질 수도 없다. 카메라봉 조작에 미숙해 바닥을 찍게 된 영상이라던가 과격하게 흔들리고 초점이 맞지 않는 영상, 시끌벅적한 교실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내는 영상들을 보고 있지만, 이 영상들은 단지 기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영화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담아내고, '함께'가 된다.
<포유동물> 릴리아나 토레스 2024
미술작가이자 대학강사인 롤라는 남자친구 브루노와 오랜 기간 동거 중이지만 아이를 낳을 계획은 없다. 주변친구들이 하나 둘씩 아이를 갖게 되고, 아이를 원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롤라는 위화감을 느낀다. 어느 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고,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는 3일 간의 유예기간을 준다. 그 사이 롤라의 머릿속은 무수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릴리아나 토레스의 장편데뷔작 <포유동물>이 던지는 질문은 퍽 도발적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 그것을 욕망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오직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이자 자연의 경이인가, 혹은 여성에게 지워지는 모든 사회적 책무의 출발점인가? 기후위기에 위기의식을 지닌 채 비건으로 살아가는 롤라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3일의 유예기간은 그에게 무수한 고민을, 일상을 통채로 갈아엎어 버리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물론 영화의 결론은 정해져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롤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영화의 초반부부터 당연하게 알고 있다. 단지 그 결말로 향하는 과정에서, 릴리아나 토레스는 롤라의 입과 표정을 통해, 롤라의 꿈 속에서 펼쳐지는 콜라주를 통해 그 과정이 가시밭길 같음을 보여준다. 그 모든 것의 뒤에서 롤라를 웃음짓게 하는 것은, 충돌과 충동 속에서 보낸 롤라의 3일을 이해하는 이의 목소리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