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달 만에 적는 <트랜스포머 ONE> 후기... 처음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을 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클래식 <트랜스포머> TVA의 컬트적인 느낌이 매끈한 3D 폴리곤 덩어리들로 대체되었고, 무언가의 오리진 스토리를 본다는 것의 지겨움도 있었으며, 조시 쿨리의 전작 <토이스토리 4>에 크게 실망했고, 무엇보다 피터 쿨렌의 목소리가 아닌 옵티머스 프라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직접 관람한 영화는 그러한 우려를 잠재워주는 수작이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메가트론이 아닌 오라이온 팩스와 D-16라는 이름의 캐릭터들은 TVA나 마이클 베이의 영화에서 보던 그 캐릭터들이 아니었다. 물론 이 영화는 프랜차이즈를 지탱하는 두 캐릭터의 오리진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우리가 아는 그 캐릭터가 된다. 다만 이 영화는 그들의 (프랜차이즈가 지속된다면 영원할) 대립의 근원을 그려내고자 했고, 두 캐릭터를 충분히 두텁게 담아냈다. 당연하겠지만 두 캐릭터의 이야기는 수없이 봐온 구도를 반복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 블랙팬서와 킬몽거... 아마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포머 ONE>을 보며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혹은 프랜차이즈 전체)를 떠올렸을 것이다. 찰스 자비에와 에릭 랜셔가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가 되어 대립하는 이야기. 오리지널 3부작이 그들의 대립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드러냈다면, 프리퀄로 제시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그 대립의 기저에 깔린 동질성과 이질성의 결합과 분열을 다분히 성적인 코드들을 통해 전달한다(물론 퍽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트랜스포머 ONE>이 택한 것은 계급사회다. 노동자 계급인 오라이온 팩스와 D-16은 트랜스포머의 정체성과도 같은, 그들이 '트랜스폼'할 수 있는 코어를 빼았긴 채 착취당한다. 계급상승의 허황된 꿈은 독재자의 카리스마를 통해 전파되고, 그것이 심어준 환상은 계급의 존재를 은폐한다. 노동자 계급의 문제아 오라이온 팩스가 벌이는 일련의 탈주들은 은폐의 장막을 활력으로 뚫고 나온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그 역동성이다. (크리스 헴스워스의 목소리가 여전히 어색하지만) 이 영화는 (베이 이후를 포함해서) 실사 시리즈들이 끝없이 고대의 존재들을 맥락 없이 소환해내며 무너져내릴 때, <트랜스포머 ONE>은 가장 익숙하고 단순한 방식을 택한다.
2. <조커: 폴리 아 되>는 도무지 그 제작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우호적인 이들이 남긴 평을 읽어보아도 그저 "전작의 억울한 오해를 풀고자 확실히 못을 박은 것"이라는 이야기들을 반복할 뿐이다.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시퀀스의 안티-뮤지컬적인 측면은 아서 플렉이라는 캐릭터를 해명하는 데 별 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아서 플렉이 조커로 고양되었다가 다시금 자신으로 북귀하는 순간을 적절히 묘사하지도 못한다. 문자 그대로 존재 이유를 모르겠는 속편.
3. 드림웍스의 30주년 기념작 <와일드 로봇>은 익숙한 이야기를 그들이 잘 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장화신은 고양이: 끝내주는 모험>에서 성공적으로 도입한 카툰 랜더링이 이번 영화에도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월-E>나 <호라이즌 제로 던>처럼 고도의 문명적 존재와 자연이 뒤섞인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주인공 로즈가 보여주는 특유의 친절함과 로봇이기에 가능한 인내가 영화의 가장 중점적인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로즈가 홀로 남은 새끼 기러기 브라이트빌을 여우 핑크와 함께 양육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는 돌봄과 (중립적 의미에서의) 모성 등의 키워드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 물론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결합으로서 '부모'를 다룬다던가 하는 지점이 있으나, 로봇과 동물이라는 이미지는 그 단점을 충분히 중화시켜준다. 나아가 영화의 돌봄은 단지 양육에 그치지 않고 양육강식의 규칙이 지배하는 자연의 세계 (영화는 이를 초반부터 드러낸다)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의 문제와 결부되며 확장된다. 세계는 변화하고, 재앙이 도래하고, 문명이라는 이름이 가하는 폭력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어떤 특출난 대책이나 새로운 사유는 없다. 다만 그것을 담아내는 익숙함이 가능한 다른 키워드와 결합될 때 발견할 수 있는 개성이 <와일드 로봇>에는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노골적으로 레퍼런스 삼은 지브리 영화에서도, 로맨스를 내세운 디즈니의 작품에서도 다소간 결여되어 있던 지점이다.
4. <베놈> 3부작은 신기하다. 정말 못 만들었는데 항상 즐겁게 보게 된다. 베놈을 유쾌한 안티-히어로로 만들어내고자 한 선택은 베놈과 에디 브룩 사이의 BL코드를 가능케 했고, <베놈: 렛 데어 비 카니지>는 그것을 '커밍아웃'한 영화였다. <베놈: 더 라스트 댄스>는 "죽음이 갈라놓을 떼까지"라는 포스터의 문장처럼 그 코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렇다. 이 영화는 한 게이커플의 이별 영화이고, 베놈과 에디는 예정된 이별여행을 떠난다. 51구역과 관련한 음모론, 코스믹호러적인 빌런 널, 갑작스레 큰 분량으로 등장한 페인 박사의 개인사와 같은 서브플롯들이 산만하게 영화 내내 퍼져 있지만, 그것들은 전혀 중요치 않다. 서브플롯의 산만함은 베놈과 에디의 이야기를 (아마도 <스파이더맨4>를 예비하는 듯한 설정놀음에) 어떻게든 끼워맞추기 위한 장치들에 불과하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쿠키영상에서 등장했듯 MCU의 세계에 잠시 다녀온 에디는 타노스 등을 언급하지만 자신이 아는 유일한 외계생명체는 베놈뿐이라 확신하고, 다시금 자신의 세계로 이동된 베놈은 "지겨운 멀티버스!"라는 대사로 본작에서 MCU와 연계될 여지를 지워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베놈과 에디의 이야기, 문자 그대로의 '라스트 댄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