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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2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1. 11월 들어 개봉작 GV를 두 번 진행했다. 하나는 김유민 감독의 첫 장편영화 <바얌섬>이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프리미어작이니 개봉이 꽤 늦어진 편이다. 인천의 (사실상) 무인도인 사승봉도에서 전체가 촬영된 이 영화는 왜란 시기 조선을 배경이다. 충청도 방언을 구사하는 소년(꺽쇠), 청년(창룡), 중년(몽휘)는 난파한 거북선에 선원이었다. 얼피 세 남성의 생존분투기를 코믹하게 그려낸, <캐스트 어웨이>와 <김씨 표류기> 같은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설정이다. 하지만 <바얌섬>은 이들의 생존을 영화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아니, '손톱 먹은 들쥐' 등 전래동화나 설화에서 차용된 판타지적 설정과 얼핏 타임루프에 빠진 듯한 이들의 반복되는 일상은 이 영화를 독특한 SF 판타지적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미약하게 감지되는 장르 설정의 맥박 위에서 세 사람은 얼핏 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난파된 거북선의 선원 몽휘가 자신의 소년-청년-중년 시절을 떠올리는 주마등이자 저승으로 향하기 전 머무는 연옥과 같은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한국 독립영화에서 좀처럼 시도되지 않는 사극이라는 점, 문명의 흔적(건물은 물론 식탁이나 의자조차 나오지 않는)이라고는 없는 배경 등은 <바얌섬>을 최근의 독립영화들이 보여주는 촬영에서 완전히 동떨어지게끔 한다. 인물은 의자에 앉거나 골목을 거닐며 대화할 수 없고, (학교, 집, 식당 등) 독립영화의 친숙한 장소들에 존재할 수도 없다. 때문에 이 영화는 그간의 독립영화가 익숙하게 인물을 담아내던 촬영과 편집의 방식에서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된다. 충청도 방언이 자나내는 익숙치 않는 분위기와, 리산드로 알론소나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슬쩍 스쳐지나가는 영화의 풍경과 리듬감이 반갑다.

2. 어쩌다보니 한 해에 같은 영화로 GV를 두 번 진행하게 됐다. 지난 1월 영상자료원에서 정재훈 감독과의 GV를 했었고, 이번에는 게임 개발자이나 영상 제작자인 멜트미러 작가와 함께 진행했다. (여전히 신기한 사실이지만) 정식개봉 이후 다양한 방식의 GV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이번 토크는 '게임'을 주제로 두고 진행되었다. TRPG의 플레이방식을 차용한 자캐커뮤에 뿌리를 둔 영화이기에, <에스퍼의 빛>이 영화/영상이라는 미디어에서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 이야기 나누고자 했다. 단순하게는 영화를 보며 떠올린 레퍼런스를 이야기하는 것부터, <에스퍼의 빛>이 어떻게 '플레이'하는 감각을 다루었는지(이건 올해 게임과 영화를 엮은 글을 여러 차례 쓰고 있는 나에게도 중요한 주제다), 청소년을 다루는 방식으로 자캐커뮤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등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특히 이 날은 내가 준비해 작가님과 나눈 질문보다도 관객들의 질문이 인상적인 지점이 많았다. <에스퍼의 빛>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주안점이 되는 포인트는 청소년부터 장르, 자캐커뮤, 다큐멘터리 등 여럿 있겠지만, 자캐커뮤/TRPG 게임으로서 이 영화를 바라볼 때 <에스퍼의 빛>은 '플레이로그의 영상화'라는 측면에서 읽히기도 한다. 동시에 다큐멘터리로써의 이 영화는 청소년들의 삶 개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도라지 불고기> 속 재일조선인들의 얼굴이 죄다 지워진 채 그들의 목소리와 풍경만이 남은 것처럼, <에스퍼의 빛>은 청소년 개개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자캐커뮤라는 틀을 빌려 그들이 살아낸 이야기을 남긴다. 그것이 연출자가 내부자로써 인게임 커뮤니티를 기록해 온 <내언니전지현과 나>, <니트 아일랜드>, <그랜드 테프트 오토의 햄릿> 등 최근의 주목할만한 게임-다큐멘터리와 <에스퍼의 빛>이 갖는 차별점일 것이다.


3. [씨네21]이 30주년을 맞이해 1995-2024 한국/해외영화 베스트 특집을 발표했다. 작년 영상자료원에서 '한국영화 100선'을 진행할 때도, 재작년 사이트&사운드에서 리스트를 받을 때도 그랬지만,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베스트 리스트는 언제나 재미없어진다. 다만 최종적으로 공개된 리스트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봉준호와 박찬욱의 영화가 베트스10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현상이라던가, 1995~2024라는 기간이 무색하게 '한국영화 르네상스'인 2003년 언저리에 맞춰진 리스트를 보고 있자면 많은 생각이 들지만... 이와 별개로 '해외영화'라는 카테고리는 (국내 상영작으로 한정하는) 연말 리스트라면 모를까, 올타임 베스트도 아니고 어딘가 의미 없게 느껴진다. (친애하는 금동현 연구자/평론가의 말처럼) 대륙이나 국가별 리스트라면 모를까... 여튼, 리스트에 대해 불평하는 것도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언제나 재밌는 일이기에, 해당 리스트의 기준에 맞춰 제출한다 생각하고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배용균 1995

<너무 많이 본 사나이> 손재곤 2000

<뽀삐> 김지현 2002

<그때 그사람들> 임상수 2005

<괴물> 봉준호 2006

<파산의 기술(記述)> 이강현 2006

<불청객> 이응일 2010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공동정범> 김일란, 이혁상 2016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동우 2020


특별언급을 추가하자면 <나쁜영화>(장선우, 1997), <송환>(김동원, 2003), <우리들은 정의파다>(이혜란, 2006),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류승완, 2008), <차우>(신정원, 2009),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임대형, 2016), <공사의 희노애락>(장윤미, 2018)

4. <프레데터: 죽음의 땅>은 꽤나 볼만한 영화였다. 프랜차이즈 최초로 '프레데터' 야우차 종족을 주인공 삼은 이번 영화는 댄 트랙턴버그의 두 전작 <프레이>와 <프레데터: 킬러 오브 킬러스>의 성공을 훌륭하게 잇는다. 사실 이는 골수팬들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기획이다. 애초에 <프레데터>는 당대의 문화적 액션 스타와의 'vs.' 설정으로 기획되었다. 첫 작품에서는 코만도이자 터미네이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두 번째 작품에서는 리썰 웨폰의 대니 글로버가 출연한 것은 그 때문이다. (<더 프레데터>로 시리즈를 말아먹을 뻔한) 쉐인 블랙이 첫 편의 각본이자 첫 죽임을 당하는 호킨스로 출연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테다. 그는 <리썰 웨폰>의 각본가이기도 하니까. <프레데터스>와 <더 프레데터>는 그러한 측면에서 실패했는데, 여기서는 vs.가 성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레데터>의 구도는 결국 대전 액션이다. <에이리언 vs. 프레데터>라는 다소 황당한 기획이 폴 W. S. 앤더슨의 손에 맡겨진 것은 그가 <모탈 컴뱃>을 성공시킨 신인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2020년대에 이러한 vs.는 성립하지 못한다. 전통적인 액션 스타의 마지막 주자였던 드웨인 존슨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렇다고 톰 크루즈와 프레데터의 대결은 성립하기 어렵다. 할리우드의 몇몇 찌꺼기 같은 영화들이 보여주듯, 무예가를 섭외해 (CGI가 대부분을 차지할) 프레데터와 싸움을 붙이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동시대 액션 아이콘인 슈퍼히어로를 소환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분노의 질주: 홉스 앤 쇼>에서 이드리스 엘바가 몸소 보여주지 않았는가.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이 프랜차이즈가 택한 것은, '몬스터버스'의 성공을 참조하는 것이다. 작년 개봉한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오리지널 4부작의 여러 특성을 조합해 SF 호러의 '원조집' 성격을 강하게 보여주었다. <프레데터: 죽음의 땅>은 프레데터 야우차 종족의 삶을 묘사하는 데 힘을 쏟는다. 마치 몬스터버스의 <고질라>와 <콩: 스컬 아일랜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웨이랜드 유타니와 합성인간은 별도의 세계관으로 분리된 <에이리언 vs. 프레데터>가 제대로 시도하지 못했던 세계관의 융합을 재차 시도한다. 물론 <에일리언: 어스> 같은 작품의 어정쩡함이 남아 있지만, 그렇게까지 정교한 세계관을 짜려는 것은 아닌 듯 하니까. 댄 트랙턴버그와 20세기 스튜디오가 그리는 프랜차이즈의 미래가 문득 궁금해진다. 또 하나의 지겨운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마무리될 것인지, 나름의 매력을 지닌 프랜차이즈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인지.

5. <프랑켄슈타인>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최고작이 될 수 없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델 토로는 흥미로운 세계를 설계하고 작동시키는 데는 능수능란하지만 좋은 스토리텔러는 되지 못한다. <헬 보이>나 <퍼시픽 림>은 그의 오타쿠 기질을 통해 성립하고 작동하는 세계를 보여주기에 성공적이었지, 델 토로의 스토리텔링이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역시나 고전을 각색한 <피노키오> 또한 마찬가지다. <피노키오>의 중심은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있는 게 아니다. 피노키오의 이야기를 어느 시공간에 놓을 것인지에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그러한 세계를 그려내지 않는다. 델 토로는 메리 셸리의 원작이 놓일 시공간을 탐색하는 대신, 자신이 사랑한 피조물에 관해 이야기하길 택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는 민망할 정도로 지겹지 않은가?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통해 했던 것을 굳이 반복한다. 오로지 자신만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 외에는 이 영화에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만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축조되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미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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