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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년 만에 SNS를 다시 시작했다. 컴퓨터에만 자료를 저장해 두었었는데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복원하지 못했다. 이후 사진이나 일기 같은 개인 기록을 온라인상에 업로드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영화와 책을 보고 사유한 것을 정리해두는 용도로 SNS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진과 함께 몇 자씩 적어둔 글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공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응원은 글을 쓰는 동기가 되기도 했고 온라인에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전의 내게 온라인상의 관계가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나 글을 쓰는 행위가 나에게 치유의 도구임을 확신하게 된 것은, 과거에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보이지 않는 관계 덕분이었다.
한 번은 SNS에 남겨진 한 댓글을 보고 마음이 쏠렸다.
“같은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과 하면 쓸데없는 얘기 한다고만 해서 답답한데 짧은 댓글로 소통하지만 같이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는 것 같아 좋아요. 감사합니다.”라는 글에 나도 감사하다는 댓글을 남기면서 문득 <어린 왕자>의 화자인 비행사가 생각났다.
어른들은 나에게 속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그런 보아뱀 그림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리나 역사, 산수와 문법을 공부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나는 여섯 살에 ‘멋진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똑똑한 사람을 만나면, 나는 늘 지니고 다니던 그림 제1호를 보여 주며 시험했다. 정말로 그 사람이 뭔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답은 언제나 같았다. "모자군요." 나는 보아뱀이나 원시림 그리고 별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카드 게임이나 골프, 정치와 넥타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 그들은 오늘 유쾌한 사람을 만났다며 매우 좋아했다.-<어린 왕자> 중
나는 비행사가 어린 왕자를 만나기 이전의 삶에 주목한다. 비행사는 자신이 그린 보아뱀 그림을 모자라고 멋대로 해석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부연하지 않고 유쾌한 사람으로 보이는 편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다니며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림을 꺼내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모자’였지만 자기 세계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비행사는 마침내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알아봐 주는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됐다. 비행사가 어린 왕자를 만났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세계를 내어 보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태도다.
우리는 그 사회가 채택한 문화와 이념을 습관화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부적응자라는 낙인을 찍는데 익숙한 사회에 살고 있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사회의 관습을 부지런히 학습하는 것이 사회화되고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강요받는다. 개인이 소거되는 삶으로 내몰리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어린 왕자> 속의 비행사와 닮아 있다.
남들의 시선이 기준이 되어 나를 잃어버리는 삶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기회가 될 때마다 품 안의 그림으로 자기 세계를 내어 보였던 비행사처럼 내 세계를 내어 보이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내게는 그것이 바로 글을 쓰는 일이다. 긴 호흡의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를 찾아왔고 이곳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려보고 있다. 글을 쓰면서 혼란스러운 내면에 질서가 생겨 감을 느낀다. 또 어느 날은 스스로 납득할 만한 나의 내면과 만나기도 한다. 이제는 누군가가 ‘모자’라고 해도 좋다. 결국 글을 쓰고 남들에게 내어 보이는 행위 자체가 내 사유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기에.
부디 당신도 자기 세계를 내어 보이는 일에 멈춤이 없기를. 언젠가 나타날 당신의 어린 왕자를 만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