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jonler May 03. 2019

지루한 싸움이 끝났다, 그런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지루한 싸움이 끝났다.

아침마다 울리던 국제전화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일도, 간헐적으로 오던 이메일에 잘 다독여놓은 마음이 뜯겨나가 아무리 웃을 일을 만들어도 일상의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던 일도 이제 정말 끝일 것 같다.




며칠 전, 남편의 어머니로부터 또 메일이 도착했다. 그동안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으셨는지 이번 메일은, 다정하고 상냥했던 며느리로서의 내가 떠오르신다며 그때가 그립고 내가 보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었다. 현재는 그 좋았던 우리의 관계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를 되짚고 계신다고 하셨다.


그 과정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하시며 나를 또다시 매도하셨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자기 안에서 답을 찾기 위함이니 이해해 달라는 배려의 언어가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내게 건넸던 언행들에 미안하다는 사과가 담겨있었다. 내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신다면서 나의 새 인생을 위해 언젠가 한 번쯤 자신들이 있는 미국에 방문해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분명, 진심인 것이 느껴졌다.


내가 보고 싶다는 시어머니의 그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시어머니가 싫고 밉다가도, 쌤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말할 사람이 없고, 그 감정을 이해해줄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연락을 해보고 싶은 미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이전과는 달라진 활자의 온도에 다시 눈물이 나면서 순간 흔들렸다. 내미신 손을 덥석 잡고 기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앞섰다. 지금 나에게 내미신 손의 따뜻함은 서로가 느꼈을 그동안의 추위로, 이내 그 온기가 사그라질 것이다.




고민 끝에, 잘못 알고 계신 사실에 대해 바로잡는 내용과 함께 이전과 너무도 달라져 버린 지난 7년여 동안의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조금 긴 답장을 했다.

쌤과 나는 한 번도 서로가 서로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적이 없었는데, 쌤이 죽고 나서 오히려 나는 쌤의 소유인 존재가 되었고, 그의 부재함이 나를 결핍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그 결핍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배제는 내가 이전에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삶이라 버겁다는 것.

분명 힘겹게 고민한 언어임이 느껴져 감사하지만, 관계를 회복한다고 해도 서로의 의도와는 다르게 또다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게 될 것이 자명해서 너무 두렵다는 것. 긍정적 답변이 아니라 죄송하지만, 적어도 내 행복을 바란다는 말씀이 진심이시라면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각자의 방법으로 쌤을 추모했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답장이 왔다.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고 내 뜻대로 연락 그만하겠노라고. 자신이 기억하는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지막 인사였다.


사람 마음이 정말 이상하다. 온갖 악한 말을 쏟아내시던 그분을 향해 ‘미움’으로 무장하고 있던 감정의 한 축이, 약해진 그분의 모습 앞에 왠지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그동안의 분노가 이렇게 약한 감정이었나. 치가 떨리는 악연이라 생각했고 그 관계가 끊어지기를 그토록 바랐는데,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진 지금 기쁘고 후련해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도대체 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 때, 요즘엔 그 감정을 보잘것없는 활자로 쏟아 마음 밖으로 꺼내버리는 비겁한 행동을 하곤 한다. 뭐라도 끄적이다 보면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어 스스로 시원해질 만한 답을 얻는데, 오늘의 이 감정은 정말 모르겠다. 

처음으로, 그동안 피하고 피했던 마음 전문가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필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