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누나들 사이에 끼어앉은 초등학생의 내가 부루마블을 이기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촌형이 강적이었다. 종이돈을 펼쳐들고 부채질하는 그 퍼포먼스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어린 나는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끝내 알아채지 못한 채 내내 얼떨떨했다. 내 말 색깔을 고를 때의 설렘도, 황금열쇠며 우주여행이며 세계 사이사이 배치된 비밀들이 주는 호기심도 어느덧 시큰둥해졌다. 그저 나는 무인도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름다운 세계의 도시들이 펼쳐져있음에도 내가 원하는 곳은 결국 거기뿐이었다. 별 수 없이 세 턴을 쉬어야 하는 곳. 흠… 어쩔 수 없군, 하며 마음을 가벼이 먹어버리고 마는 곳. 그래서 잠깐 아이스크림이나 꺼내올까? 하는 여유도 생기는 곳. 안락한 섬 안에서 실은 제발 더블만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마지못해 주사위를 던졌다.
부루마블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소판 위에서 나는 주로 무서웠다. 도쿄며 파리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구간 앞에 서서 주사위를 굴려야 할 때의 공포를 기억한다. 런던이나 뉴욕을 밟기라도 하면 내가 가진 거의 모든 것을 헐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또다시 빈털터리에 가까운 몸이 되어 비틀비틀 한 바퀴를 돌면 내 손에 쥐어지는 월급이란 고작 사회복지기금이나 한번 낼 수 있을 푼돈이었다. 이 작은 돈들로 대체 어떻게 해야 사촌형처럼 부자가 되는지, 고작 한줌의 월급들로 어떻게 저런 부동산을 가질 수 있는지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매번 졌다. 그놈의 인디안밥은 늘 내 차지였다.
초등학생이 자라 성인이 되자 이번엔 사회가 나를 엎드려놓고 등짝에 인디안밥을 갈기기 시작했다. 아는 맛이었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자에게 내려지는 맛. 그 매콤한 맛을 보다보면 어린시절의 부루마블과 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부루마블의 그 사회복지기금이 “너는 자라 사회로부터 온갖 희한한 논리와 명목들로 세금을 뜯길 것”이라는 예언이었다는 것도 세액청구내역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여전히 모르겠는 건 이기는 방법이었다. 대체 뭘 어찌해야 내 작고 소듕한 월급들로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릴 수 있는 건지, 노동소득에서 자본소득으로 이어지는 길은 어떻게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최 모르겠으므로, 나는 자본에 대한 이해 대신 맷집을 늘렸다. 경쟁사회며 자본주의가 또 인디안밥을 때리면 그냥 때리는대로 맞았다. 맞다보니 그럭저럭 맞을만했다. 벌겋게 부어오른 등짝에 마데카솔을 발라가며 한 바퀴, 다시또 한 달을 돌아 주어지는 한줌 월급으로 한 바퀴. 망할 사회복지기금을 욕하며 또 한 바퀴. 그렇게 이 사회로부터 성실히 돌려져왔다.
세탁기 속 양말처럼 돌려지기를 근 40년. 드디어 나도 1승을 거뒀다. 나 상천쓰 39살 4개월, 능지이슈로 판이 어떻게 도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돌리는대로 돌려지며 인디안밥을 처맞기만 반복하다, 마참내, 자본주의로부터 한번 이겨봤다. 공동창업자로서 지난 11년간 키워온 회사가 피인수된 것이다. IT프로덕션 아웃소싱 사업체인 모회사와 2개의 자체서비스 법인 중 자체서비스 법인 하나만 남기고 둘을 매각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흔히 말하는 엑싯(Exit)을 경험하게 됐다.
뭐 그렇다고 지금부터 평생 유유자적할 만큼의 부를 갖게 된 건 아니다. 그냥 딱 아 이제 죽지는 않겠구나 싶을 정도의 돈이 생겼다. 그리고 세 턴의 휴식이 주어지던 부루마블 그 무인도의 시간처럼 안락한 3개월의 휴식기간이 생겼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휴직. 낙원이었다.
처음 한 달은 병원투어를 하며 그간 혹사시킨 몸을 치유하는데 할애했다. 주사와 충격파로 손의 염증을 치료하고, 불면증 약을 끊고, 한쪽만 남겨놓은 채 그간 뽑지 못하던 왼쪽 사랑니도 드디어 뽑았다. 무려 43kg이라는 미친 아이도루 몸무게까지 내려간 체중을 끌어올려 앞자리를 바꾸고, 빠진 체력을 채워넣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자 모든 연락을 끊고 여행을 떠났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사실 여행은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말을 좀 안 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힘이 들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먼저 온다. 이미 한 말이 돌아와 한숨이 되고 앞으로 해야할 말들 앞에서 막막해진다. 최소 열흘 정도 묵언수행을 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해왔다.
차를 몰고 정해둔 목적지 없이 그때그때의 마음따라 국내 이곳저곳을 흘러다녔다. 도착하는 곳은 대체로 숲이나 바다였다. 담양의 대나무숲, 순천의 습지, 보성의 녹차밭. 혹은 어딘가의 야생림, 메타세쿼이아길, 호수공원, 해변 들. 온종일 입을 닫은 채 운전을 하고 숲을 걸으며, 마치 길 위에 뭘 흘려보내듯이 고요히 흘렀다. 독성이 있는 식재료를 물속에 담가두고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불순물은 가라앉고 맑은 마음이 위로 떠오르길 기다리며.
그렇게 두 달간 몸과 마음을 치유하자 그제야 여유가 생겼다. 입맛이 돌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잠이 달았고 눈을 뜨면 반겨주는 고요함이 기분 좋았다. 어지럽던 생각들은 각자의 위치로 알아서 분류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사회적 페르소나가 아닌 온전한 나로 지내는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 10년간 늘 나보다 회사가 먼저였으니까. 고요한 시간의 치유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서 경험하는 와중에도 놀라웠다.
마지막 달은 평화 속에서 푹 쉬었다. 때론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때론 루틴을 만들며. 무엇보다 어떠한 날에도 느긋함을 잃지 않았다. 모두에게 관대했다. 스스로에게도. 우리가 싸울 상대는 타인도 자신도 아니고 오직 자본주의일 뿐이니까. 무인도에 들어와있으니 겁먹거나 싸우거나 견딜 것도 없었다.
좀처럼 읽히지 않던 책도 기분 좋게 읽고(성해나가 제일 좋았다) 새벽까지 게임도 하고(젤다 갓존잼) 거의 매일 영화를 봤다(여유가 있으니 고전도 봐진다). 따스한 햇빛으로 일어나 창을 활짝 열고 커피를 내렸다. 음악을 들으며 창밖에 산책하는 개를 구경하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빨래를 개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기를 쓰거나 복귀해서 써먹을 공부도 조금씩 하면서. 모든 순간이 평화로웠고 하루하루 행복했다.
낙원에서의 3개월을 보내고 이제 다시 자본주의의 판 위에 올라선다.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7월 1일 회사에 복귀한다. 다시 시작이다.
여전히 자본주의를 잘 모른다. 모든 것이 어렴풋하다. 그저 이제야 겨우 1승을 거뒀을 뿐이다.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순간은 여전히 무섭다.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믿을 건 나의 맷집뿐이다. 저 판 위에서 나는 앞으로도 무인도가 간절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이제 한 번은 이겨본 상대다. 전보다는 상대할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