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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밤 Feb 03. 2022

영화 '왕의 남자',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

영화 '왕의 남자(2005)'를 본 후기

출처: 다음(Daum) 영화 '왕의 남자'

영화 '왕의 남자(2005)'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가서 본 영화이다. 천만 관객이 넘게 본 흥행 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나를 데려간 것이겠지. 당시 나는 이준기의 엉덩이를 보며 부끄러워 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장생(감우성 粉)과 공길(이준기粉)이가 줄에서 힘껏 점프한 것이 멋지다고 생각한 게 전부였다. 이 영화를 햇수로 17년만에 (이 숫자가 믿기지가 않는다만) 다시 보게 되었는데,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미와 색감에 한 번 놀랐고, 과거엔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던 연산군(정진영 粉)의 연기에 또 한 번 놀랐다.


연산군은 폭군이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신하들을 향해 한치 망설임 없이 칼을 휘두르고, 백성들의 고혈로 만든 비단옷을 잔뜩 둘렀지만 백성들의 나은 삶을 위한 국정은 관심 밖에 있다. 장녹수와 함께 말초적 쾌락만이 가득한 삶을 추구하는 못난 임금 연산군은 그렇게 신하들의 외면을 받으며 점점 더 초라해진다. 군주로서 연산군을 마냥 옹호하고 싶진 않다. 연산군이 호위호식하며 누리는 혜택과 권리의 반대 급부로써 그는 마땅히 제 할일을 다할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왕이 되는 것을 선택하였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마냥 '폭군'으로만 규정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난 20대 초반에 내가 좋은 리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반응에 지나치게 예민했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차분히 경청하길 어려워했고, 사람들을 부드럽게 통솔할 줄 몰랐다. 아마 그때 나와 같은 조직에 있던 사람들은 나에게 리더로서 실격 점수를 줬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돌이켜봤을 때도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왕의 남자 속 연산군의 모습에서 내 모습의 일부를 보기도 했다. 쾌락에 탐닉했다는 뜻이 아니라, 초라하고 실패한 리더의 모습 말이다.


출처: 다음(Daum) 영화 '왕의 남자'

그냥 리더의 삶을 살짝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왕관의 무게는 참 무겁다.' 난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조직 구성원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난 꽤나 훌륭한 서포터니까. 맡은 일을 충실히 다하고, 한 단계 더 좋은 의견을 내고, 그것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어쩌면 연산군이 폭군이 된 것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었고, 그에게 그런 옷을 입히기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인 웃사람들의 권력 암투 때문일지 모른다. 그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왕위에 대한 연산군의 부정적인 감정이 여러 번 드러난다. 법도와 예의를 강조하는 신하들을 등지고 자신이 왕인데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하는 모습, 장생에게 귀한 임금의 모자를 바치며 아이와 같이 웃는 모습. 마치 자신이 왕이 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처럼, 사실 왕위 따위 지긋지긋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광대들과의 놀음판에서, 공길이와의 그림자 놀이에서만 현실을 잊고 마냥 해맑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가상 세계에 강하게 감정이입을 한 결과,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신하와 후궁들을 죽이는 참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산군 그에게 광대들이란, 늘 가슴 깊숙히 숨겨두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 아픔, 행복 등을 재현해 주는 매개체였을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강렬하고 거센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출처: 다음(Daum) 영화 '왕의 남자'

연산군은 자살 시도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간절히 떠나길 바라는 공길을 놓아주고 결국 장녹수의 품으로 돌아간다. 장녹수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슬프고도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던 연산군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외롭고 위태롭게 왕위를 지켜오지 않았을까. 자신이 바라는 것을 포기하고 묻어둔 채, 현실을 외면하고 눈 앞에 있는 쾌락을 좇으며.


영화 '왕의 남자'를 본 뒤 동성애 코드, 광대의 삶(그리고 오늘날의 연예인의 삶) 등 꺼내어 쓰고픈 이야기 소재가 무수히 많았지만, 결국 연산군을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이유는 결국 영화 속 연산군의 삶이 내 삶의 일부와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그의 삶을, 그리고 아마도 나의 삶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행한 모든 행동들이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영화 속 정진영의 연기는 연산군 삶의 처절한 고독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는 후세에 길이 남을 좋은 군주가 되는 것에 실패했지만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애도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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