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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밤 Apr 25. 2022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좀 쩔어있는" 이야기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2022)' 리뷰

나에겐 몇 가지 난치성 질환이 있다. 큰 병원에 가야하는 병이 아니라 소소하게 나의 삶을 괴롭히는 짜증나는 병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다한증'이다. 초등학교 5학년 쯤이었을까. 아주 작은 긴장에도 손에 땀이 비오듯 나기 시작했다. 그 땀은 발로도 옮겨갔고, 어느새 등, 허리, 겨드랑이 내 곳곳을 침범했다. 다른 신체 부위들은 어차피 옷을 입으면 잘 보이지도 않겠지만 손발에 땀이 많이 나는 것은 사회생활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악수할 때, 시험 문제를 풀때, 신발을 벗는 식당에 갈 때 나는 남들이 할 필요 없는 고민에 시간을 쏟게 된다.


그.런.데.


출처: DAUM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이런 다한증족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흥미롭게도 다한증이 주인공의 불안과 외로움을 표현하는 주된 소재로 쓰였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친척 집에 더부살이 하는 춘희(어린 춘희, 박혜진 粉)는 자신을 떠맡기 싫어 싸우는 친척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손의 땀을 닦아댔다. 그리고 마루 바닥에 생긴 땀 발자국을 닦았다. 그렇게 언제나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워야만 했다.


다한증을 가진 글쓴이가 느끼기에도 사실 이러한 불안과 외로움의 감정들은 다한증과 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 역시 손을 잡았을 때 상대방이 찝찝해하는 표정을 무수히 보아왔고, 땀 나는 손에 대해 얘기할 때 'X 더럽다'는 말도 들어 보았다. 물론 춘희에 비하면 내 다한증은 애교 수준이지만, 땀 때문에 선생님과 춤을 추다 무안을 받는 장면에서도, 친척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아무 말 못한채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던 춘희를 진심으로 이해했다. 사실 땀이 많다는 것은 '털이 많다', '키가 크다'와 같은 특징 중 하나일 뿐인데, 남들에게 쉽게 이해받긴 어려운 질병인 것 같다.


출처: DAUM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다한증은 교감신경이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반응해서 나타나는 질병이다. 특히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가 가장 큰 병의 원인이라고 한다. 나도 깨닫지 못하는 어떤 불안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나를 예민하게 지키고 있는 것일테다. 영화 속 마음 치유 프로그램에서 춘희(어른 춘희, 강진아 粉)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실 제가 좀 쩔어있거든요"... "땀에". 아버지의 폭력으로 말을 더듬는 주황(홍상표 粉)의 얘기를 듣던 춘희는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할 수 있었다. 그 후 주황과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지만, 주황이 자신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하자 그에게 화를 내고 헤어지자는 말을 건낸다.


춘희는 사실 땀 말고도 쩔어있는 게 많았다. 어른이 된 후 춘희는 마늘을 까는 일을 했고 일의 대가로 받은 3만원을 차곡차곡 통장에 모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누군가와의 깊은 우정도, 사랑도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땀 뿐만 아니라 가난과 마음 속 깊은 외로움에도 쩔어있었다. 하지만 춘희는 자신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 자기 물건을 내어주고, 편견 없이 주황의 얘기를 웃으며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참 대단한 친구다.) 사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춘희를 제대로 책임지지 못했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할머니도, 친척들도, 춘희를 깊은 외로움 속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춘희는 어디서든 혼자서 살아남았고 스스로를 책임져 왔다. 그리고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왔다. 그래서 주황의 그런 영혼 없는 책임감이 부담스럽고 싫었던 것 같다.


출처: DAUM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춘희는 결국 어린 춘희와 화해한다. 다한증이 혐오스러워 불로 손을 지지려던 과거의 자신을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과 외로움도 꼭 안아주었다. 이 장면 이후의 춘희는 다른 사람의 다정함을 거부하던 과거의 춘희와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왠지 앞으로의 춘희는 마냥 혼자가 아닐 것만 같다. 여느 때보다 충만한 춘희 자신도 함께 삶을 살아내고 있고, 빵을 나누어 먹는 친구도 생겼고, 문득 안부를 전하고픈 주황도 있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면 나 역시 이런 예쁘고 아프고 짠한 춘희의 삶이 문득 궁금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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