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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밤 May 01. 2022

영화 '잔칫날', 남은 사람들의 내일에 관하여

영화 '잔칫날(2020)' 리뷰

아무래도 아직 20대라서 그런지 누군가의 장례식을 많이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이제서야 장례문화를 조금씩 익혀가는 단계랄까. 장례식장에 가기 전 급하게 유투브를 찾아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 저것을 물어보게 된다. 부조는 어느 정도 해야하는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곤 한다. 어렸을 땐 장례식장에서 화투치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많이 놀랐다. 가족들의 슬픔과는 대비되는 그 떠들썩한 분위기가 싫었다. 그 때의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직도 장례식은 갈 때마다 참 어려운 공간이다. 며칠 전 장례식장을 방문한 이후 영화 '잔칫날'이 정말 보고 싶었다. 장례식에 관한 영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남겨진 남매에 관한 영화. 이 정도의 영화 내용만 알고서 늦은 새벽 혼자 영화를 보았다.


출처: DAUM 영화 '잔칫날'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되어 소리내어 욕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새벽 감성이라 그랬던 걸까. 주인공 남매의 이런 저런 감정들이 내 명치 끝에 쿡 하고 닿았다. 경만(하준 粉)과 경미(소주연 粉)는 아픈 아버지를 번갈아가며 병간호하는 어린 남매이다. 20대 초반 정도 됐을까. 경만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전국 곳곳에서 행사를 뛰는 MC 일을 하고 있다. 비록 급여가 제때 들어오진 않지만, 늘 새로운 일감을 물색하며 악착 같이 돈을 버는 청년이다. 하지만 아직은 사회 경험이 많이 없고, 기센 어른들에 비하면 한참 어리고 유약한 그런 평범한 사회 초년생이다.


경미는 오랜 휴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히 아버지를 돌본다. 친구들과 잠깐 수다를 떨어도 병원 오는 시간이 늦었다며 오빠에게 혼나기만 한다. 그렇게 두 남매는 투닥거리지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병간호를 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서로를 보며 웃는, 그런 따뜻한 가족이다.


출처: DAUM 영화 '잔칫날'


그러나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일어난 일들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경만이는 수많은 선택을 해야 했다. 손님들께 어떤 국을 대접할지, 편육을 포함할지, 꽃은 생화로 할지 조화로 할지, 발인은 몇시로 할지 등등. 경만이는 이런 수많은 선택의 폭풍 속에서 결국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에도 모질게 값이 매겨진다는 것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상주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팔러 삼천포로 내려갔다. 동생 경미에게 집에 잠시 내려갔다 오겠노라 거짓말을 하고서.


경미는 경만이 없는 널찍한 장례식장에서 진상 친척 오빠를 상대하기도 하고, 장례 문화를 모른다며 온갖 타박을 해대는 이모들을 견디고 있었다. 집에 갔다온다더니 하루 종일 연락이 안되는 경만에게 울면서 욕을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사실 경만이는 어느 잔칫집에 MC 일을 하러 갔지만 주인공인 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죽음의 원인 제공자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었다. 슬픔 속에서도 힘겹게 돈을 벌러 왔지만 되레 가해자 취급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욕을 한 이유도 마을 사람들의 적반하장식 태도 때문이었다. 일한 댓가도 제대로 주지 않고, 범죄자 취급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출처: DAUM 영화 '잔칫날'


결국 마을 사람들의 오해는 풀렸지만 경만이의 억울함과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경만이의 처지가 안타까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쩌면 극도의 가난함은 그들로 하여금 상식 밖의 행동을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고생한 경만과 경미를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주고 있었다. 경만이에게 사과하며 부조를 하는 마을 사람들, 힘내라며 따로 한번 더 부조를 하는 친척 형,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 웃음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고객까지... 주인공들에게 영화 속에서 이리 저리 구르느라 고생했다고 토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사실 이 영화는 전래 동화 느낌의 흔한 사필귀정의 교훈을 가진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두고두고 또 보고 싶은 이유는 이런 단순한 소재에도 몰입감 가득하도록 배우들의 연기가 진정 짠내 났고, 시나리오 자체가 무척 짜임새 있게 쓰여져 한시간 삼십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최근에 이별을 겪었거나 장례식장에 다녀와 울적한 기분이 느껴질 때 이 영화를 보며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으리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좋은 한국 영화를 만나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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