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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Mar 24. 2016

01. 바람 창고지기, 알레흐
; 더 비기닝

바람이 가는 곳을 따라가 보면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거야..


아침에 눈 뜨기 싫다..

마지막 세 번째 알람이 울릴 때까지 이불속에서 버티고 버틴다.

잠이 안 깨서가 아니다.

뇌는 이미 자각 상태에 있지만, 몸은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있다.

뇌는 몸의 이러한 반항을 파악하고, 게으른 몸이 일어나서 준비하고 직장까지 가는 시간과 발생 가능한 오차 등을 완벽하게 계산하여 지각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그려보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계산된 마지막 5초까지 카운트다운을 한 후에야 비로소 몸은 마지못해 일어나 대충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선다.

매일 아침이 스타워즈를 방불케 하는 치열한 전쟁이다.


그렇게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은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다.

사는 게 재미없다며 투정 부릴 나이도 훌쩍 지났고, '꿈'이라는 단어는 이제 사치이거나 혹은 아직 철없는 어른 아이의 유물처럼 여기는, 소위 다 자랐다는 어른들의 시선이 불편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시작하면서 넘치는 열정과 패기로, 나 없이는 조직이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꽤 보람을 느끼며 했던 일들은 한 해 두 해.. 연차가 쌓여갈수록 별거 아닌 것들로 변질이 되어갔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라는 새내기의 넘치는 긍정 에너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변화와 혁신이 불가능하게 설계된 듯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조직시스템과 개인의 불행한 가정사 및 올바르게 해소되지 않은 자괴감으로 꼰대로 변해버린 일부 상사들, 그리고 시스템 에러와 과부하를 초래하는 불량 동료들에 의해 "나 하나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세상은 변하지 않아"라는 비관적인 세계관으로 변질되고 쪼그라들어 서서히 소멸되어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알아버리고 말았다.

조직은 내가 없더라도 충분히 돌아간다는 걸..


그리고 그런 실망감과 상실감을 털어놓고 위로받기 위해 만난 친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슷한 경험들을 털어놓았고, 결국 그들의 증언을 통해 그렇게 부조리한 시스템의 근본 구조는 이 나라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똑같이 적용된다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상사나 동료들은 얼굴만 다른 도플갱어의 모습으로 다른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런 거지 같은 상황을 술로 달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일을 또 살아가는 게 성숙한 어른이라는 사회적인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초월한 다 큰 어른인 척해야만 했다. 그렇게 거듭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려 구역질 나는 현실들을 외면하다 보니 정작 즐거웠던 소소한 일들에 조차도 무뎌지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바람이 되고 싶다며 수줍어하던,

동그란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이 몹시 사랑스럽던 그 아이는

마침내 중력에서 자유로워져 지구별을 탈출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들 놀랐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그렇게 우리들의 지루한 일상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불현듯 그 아이의 부재가 떠오를 때마다 스무 갈래의 손가락 발가락 끝으로 온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은 듯 멍해지곤 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무기력의 늪으로 침잠하고 있을 무렵,

멍하니 앉아있던 나를 누군가가 부르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이 마주친 녀석은 장식장에 앉아 있던 인형이었다.

언제부터 거기 앉아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녀석.. 그런데 어떻게 말을?

녀석을 꺼내서 들고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지 세상이 미쳐가고 있는 건지..

모습은 달랐지만 보면 볼수록 그 아이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녀석은 지구별을 탈출한 이후 바람 창고지기가 되었다며 자신을 알레흐라 소개하고는,

원한다면 내게 바람 창고를 하나 분양해 주겠다며 이렇게 물었다.


 " 진짜로 행복해지고 싶어? 그런데 왜 하고 싶은 걸 당장 안 하는 건데?"


 "그게.."


머쓱한 마음에 먹고사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내게 알레흐가 종이와 연필을 쓱 내밀며 말했다.


  "진심으로 바라는 걸 한 번 구체적으로 그려봐. 그러면 의외로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어.."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마지못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으려 동분서주할 생각에 불안하고 초조해야 정상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편안했다. 묘하게도 누군가가 꼼꼼하게 설계라도 한 듯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퇴직금을 받았고, 동시에 적금 만기일도 찾아왔다. 만일을 대비해 최대한 긴축재정을 유지하고, 또 다른 적금으로 갈아타는 게 당연했겠지만, 금리가 너무 낮아서 적금 재예치도 살짝 고민되기도 했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유럽 환율이 사상 최저라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마음속에서 어떤 바람 하나가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참에 혼자 여행이나 떠나 볼까.."


그리고 모든 것이 마치 계획된 일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착착 진행되었다.


하지만 늘 그래 왔듯 나중 일에 대한 근심, 걱정, 염려 3종 종합세트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여지없이 발목을 붙들기도 했다. 자꾸 주저하는 나에게 알레흐는 하나만 명심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If you decide to go, go without fear.
You have only one life.
하기로 결심했다면, 두려워하지 마.
인생은 단 한 번 뿐이니깐.

단호한 알레흐의 말에 용기를 얻어 어느덧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꺼내놓았다. 그리고 어느덧 아침에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책은 없지만 두려움도 애써 물리쳐가며 알레흐가 분양해준 바람 창고를 차곡차곡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잘 지켜줄 테니까 도둑맞을 일은 없겠지..




알레흐와 함께 얼음과 불의 나라로 건너가 찾은 빙하라는 보물 (Jökulsárlón, Iceland - Oc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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