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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 Mar 24. 2016

02. 근사한 하루 씨와의 조우

헬싱키에서 마주친 청년 하루 씨..


하루 씨는 만성 우울증상을 겪고 있는 무뚝뚝한 중년의 아저씨이다.

마누라의 잔소리로 얼마 전부터 끊은 담배 때문에 찾아온 금단현상으로 자꾸만 위험천만한 단 것들에 손이 간다. 그렇다고 한 달 반 동안 어렵게 끊은 담배를 다시 피기는 자존심 상하고.. 

무의식 중에 자꾸 단 걸 집어먹고 있자니 총무과 여직원의 눈길이 곱지 않다. 지난달 승진한 입사 동기 대신 승진했더라면 이런 수모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움찔한 하루 씨는 슬며시 화장실로 걸음을 옮겨 양치를 해본다. 양치질을 하고 나면 잠시 동안은 단 것에 대한 충동이 사라질 테니깐..

그렇게 3분가량 분노의 양치질을 하고, 물로 입 안을 헹궈낸다.

그러다 문득 들여다본 거울 속에는 너무나도 낯선 모습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얼른 배에 힘을 줘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슬슬 라인이 무너져가는 배꼴도,

뒤로 슬쩍슬쩍 밀려나기 시작한 헤어라인도,

이제는 더 이상 중력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쳐지기 시작한 눈꼬리와 입꼬리도 문득 낯설다.

하루 씨는 부쩍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 친구 녀석을 만나 술이나 한 잔 하면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연쇄반응처럼 따라오는 마누라의 구박은 차치하더라도 이제는 늙어가는 몸뚱이가 숙취를 감당해내지 못하니 섣불리 친구를 불러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자꾸 밖으로 심하게 마중 나오는 야속한 코털들마저도 하얗게 세기 시작했다!


사실 청년 시절의 하루 씨는 정말 근사했다. 얼굴을 쑥대밭으로 만든 여드름들도 쏙 들어갔고,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어딘지 모르게 불균형해 보였던 골격도 균형을 제대로 찾았으며, 썩 나쁘지 않았던 인물을 다운그레이드 시켰던 교정기와도 영원한 이별을 했다.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훤칠한 키에 각 잡힌 몸매, 균형 잡힌 이목구비로 조금은 암울했던 사춘기 시절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훈남이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고,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한 번 싱긋 웃어주면 껌뻑 넘어가는 여자들이 줄을 섰더랬다. 정말 그랬더랬다. 이제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린 마누라는 다음 생에 하루 씨를 만나는 일 없이 반드시 혼자 살아보겠노라고 호언장담하지만, 20대의 하루 씨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한눈에 반했고, 첫 키스를 나누던 날에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꼭 당신을 만나서 사랑하고 싶다고 수줍게 고백도 했더랬다.


한 때 잘 나갔던 인생의 여름, 찬란한 황금기였던 청년기에 대한 회상은 거울 속에 있는 지금의 하루 씨 모습을 더욱 우울하고 질척하게 만들 뿐이다.


"휴........"


한숨 한 번 길게 내쉬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가 일에 집중해본다. 하지만 모니터 화면은 자꾸만 어릿어릿해지고, 집중력은 예전 같지 않다. 10분쯤 지나니 다시 단 거에 대한 충동이 밀려들었다. 금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꾸 하루 씨의 몸 안에서 코르티솔의 분비를 촉진하고 있고, 그로 인해 포도당에 대한 갈망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는 것이다. 뱃속의 내장지방은 늘어만 가고, 늘어가는 내장지방만큼 하루 씨의 우울함도 커지고 있다. 되는 일도 없고, 뭐 하나 낙이 없다.. 자꾸 애꿎은 시곗바늘만 쳐다본다.


때 마침 시작된 점심시간. 하루 씨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온다.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지속되는 잔뜩 찌푸린 날씨로 전 국민의 우울증 발생 빈도를 높이는데 일조한다고 악명이 자자한 헬싱키의 가을이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하늘에 구름 한 점 찾아보기 힘들다. 우울증에는 광합성이 최고의 명약이라는 신경정신과 상담의 야스까 박사의 권장사항을 되새기며 점심 대신 일광욕을 선택한 하루 씨는 근처 공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회사에서 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간다. 그리고 공원 입구에서 아홉 번째 나무 아래 있는 벤치로 가서 앉는다. 거기 앉아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져서 얼마 전부터 공원을 찾을 때마다 지정석처럼 찾는 자리이다. 




사실 하루 씨에게는 남모른 은밀한 비밀이 하나 생겼더랬다.

몇 달 전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내용과 영상미도 기대 이상으로 흡족했지만, 그 동양인 주인공들이 뱉는 언어에 묘하게 마음이 끌렸다. 영화 제목은 'Old Boy.' 주위에 꽤 본 사람들이 많았고, 영화에서 사용된 매력적인 언어는 한국어였다. 그 날로 틈나는 대로 인터넷 서핑을 하며 한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떠듬떠듬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맛있다', 등의 짧은 문장들이 입에 익자,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큰 맘먹고 한국어 교본도 하나 주문 구입했다. 한국 관련 동영상을 찾아 듣고, 들리는 대로 따라 해 보는 것도 쏠쏠하게 재미가 있었다. 공원 입구에서 아홉 번째 나무 아래 있는 벤치는 바로 하루 씨 혼자만의 한국어 학원인 셈이었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고.. 이제는 교본에 나와있는 틀에 박히 대답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다른 말들을 열심히 적어놨다가 다른 답변들로 응용해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하루 씨 자신만의 너무도 후한 평가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루 씨는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려 공원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선다. 길 건너에는 한국인으로 여겨지는 한 동양 여자가 지도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씨는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들고 통화를 하는 척한다. 여자는 초록불이 켜지자 길을 건너 하루 씨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하루 씨 앞에 서서 전화 끊기를 기다린다. 하루 씨가 전화를 끊자 여자가 머뭇머뭇 지도를 펼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Excuse me, could you show me how to get this place?"


의외로 유창한 영어에 하루 씨는 살짝 당황한다. 지도에서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마침 하루 씨가 점심시간을 보내고 나온 바로 옆 공원이었다.


 "Oh! Just cross the road, then you will find the park right there."


나름 친절하게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준 하루 씨는 뭔가 결심한 듯 한 마디 덧붙인다.


 "Can I ask where you are from?"


 "Oh, I'm from South Korea."


하루 씨는 기다렸다는 말을 잇는다. 


 "혼자 여행.. 왔어요?"


여자가 흠칫하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와~ 대박! 한국말 잘하시네요?"


하루 씨는 어깨를 으쓱하며 떠듬떠듬 대답한다.


 "잘은 못하고.. 조금 말해요. 헬싱키 가을 날씨.. 이르케 조은 건 많지.. 않다에요.. 럭키 걸이에요."


 "정말요? 헬싱키는 날씨가 늘 이렇게 좋은 줄 알았는데, 사람들도 다들 제가 운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네, 매우 럭키 럭키 걸이예요."


 "그렇군요. 암튼 길도 친절하게 알려주시고 고맙습니다!"


 "여행 재밌게 하세요."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고는 하루 씨가 오던 길로 향하는 한국인 여자를 눈으로 배웅하며 고개를 돌리자, 마침 멀찌감치 서서 서로 속닥거리던 총무과 여직원 둘과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그들은 뭔가 대견한 일을 칭찬이라도 하듯 하루 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웃어준다. 하루 씨도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답해주고 횡단보도를 건넌다.


가을 햇빛이 참 좋다.

어쩐지 반짝 다시 청년이 된 기분이 드는 헬싱키의 하루 씨다. 





로또 당첨만큼 만나기 힘들다는 헬싱키의 어느 화창한 가을 하루 (Helsinki, Finland - Oc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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