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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큰소리 Jun 28. 2024

아버지 발자국 따라 걸어보기

웃기게도 제가 지금 아버지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는것 같습니다


살면서 후회를 안할수는 없고 조금이라도 덜 하고 싶다면 생각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생각은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안 일어 난다는 말 ... 기억 하세요

우습게 생각 했는데 바보 맞는것 같습니다

추억은 지금이 아니라 지난 후에 기억 되어 지는게 추억 같습니다

추억이든 악몽이든 나중에 가를일이고 지금은 그냥 많이 만들어 두면 어떨까 싶습니다

흘린 기억이 너무 없으면 슬플테니까요


송탄 성당은 아닌데 비 오는날 너무 좋아서요



도렴동 청진동 중학동 효자동 청운동 통인동 이문동 석관동 장위동 삼청동 가회동 후암동 반포동 황학동 논현동 역삼동1 역삼동2 서초동1 서초동2 신길동1 신길동2


참 많이도 다녔던것 같습니다

7살때부터 지금까지 살았고 사는 동네 이름입니다

삼청동까지는 국민학교 6학년 동안 이사 다닌 집 10곳의 동네고 가회동에서부터 서초동2 까지는 중고등학교  6년동안 이사 다닌 8곳의 동네입니다   아버님이 송탄서 조그만 의원 하시면서 시장 좌판 노인네들과 양공주들과 생활 하시며 똘끼 충만하고 딴짓거리 완빵인 자식 속 모르고 서울로 유학 시켜 공부하는 자식이 신의 생각 때문에 전월세 돌아 다니는게 걸리셨는지 아니면 어떤 계기가 계셨는지 모르지만 반포동 살던 중학교 3학년 무렵때 쯤 딱 그때부터 갑자기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이 달라 지셨습니다


치료비 아까워 주사 약 들고 오는 시장 노인네들께 주사비만 받거나 그냥 놔 드리고 보내고 의사란 양반이 자기 부인은 시장서 옷장사를 해야 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도 감수하던 양반이 그 즈음에 공짜 진찰이나 주사는 물론 야간 진료까지 일절 중단 하셨고 그대신 막내 삼촌에게 시켜 지금의 테헤란로인 역삼동에 100평짜리 집 두채를 짓기 시작으로 제일생명 영동시장 뉴욕제과 근처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팔고 사는 남들이 말하는  장사를 시작 하셨고 집장사를 그만두실 즈음 서초동 집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돈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영종도 땅을 구입하셨습니다

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금싸라기 땅들도 아버진 병원밖에는 모르는 양반이라 이재에 밝지 못하고 남의 말 아니 형제도 부모도 없는 혈혈단신이라 동기간을 많이 믿으셨고 도와 주셨던 모양입니다

또 제일 믿었던 유명백화점 몇군데에 큰 매장을 운영하다 경마에 미쳐 모든걸 날려 먹고 캐나다로 도망간 막내이모와 지 자식들 둘다 해외 유학까지 보내며 청계천에서 공구상을 하다 강남 조그만 호텔을 운영했던 째 이모에게 다 털려 먹고 남아 있어야 할 영종도 땅까지 사기 아닌 사기를 당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냥 허허 웃고 마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 수백억 이상의 가치를 날려버리고도 말입니다


그 이후 아버진 다신 우리 가족 외에는 친척이던 뭐든 누구도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먹을거 다 먹어 뻔뻔하고 당당해진 그들의 모습에 신물이  오만 정이 다 떨어졌겠지요

(웃긴것은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 마저도 따라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또다시 아버진 가슴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우리집만 풍비박산 내고는 몇년 가지도 못한 외도는 끝이 났습니다

당연히 할매를 제외한 모친의 9남매 형제와 친척들 사촌들도 저 또한 안 만납니다

잘 먹고 잘사는게 배 아퍼서가 아니라 대부분 외국 이민을 떠났고 국내에 있어도 유학파들이라 높으신 양반들이 되어 계셔서 만날수가 없고 무엇이 구려 피하는지 피했거든요

솔직히 얼마전까지는 부럽기도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어느정도 읽어질 시간이 되었는지 마음이 편해지고 조금씩 만족하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아직도 가끔씩 제 자식들 힘들어 할때면 마치 아버지가 그랳던건 것처럼 저도 후회스럽고 옭고 그름을 떠나 진짜 괴물같은 그들이 승자고 아버지가 패자일까 하는 생각과 혼란스러움 때문에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또한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때 국기원이 있던 역삼동은 제 3한강교를 건너자 마자 리버사이드호텔 입구 지하차도부터 시작으로 비포장 도로는 물론이고 장화 없으면 학교도 가기 힘든 곳이고 버스 노선도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온 78번 버스와 성남서 을지로 5가까지 운행하는 239번 버스 두대뿐 이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모든걸 감수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한밤중 들이닥쳐 산모와 태아 모두 위험한 상황에 동의 없이 응급 낙태 수술을 해주고도 수술비가 없어 새벽에 도망친 산모의 오빠에게 살려준 은공보다 뒷통수를 제대로 맞아 수원 교도소에 수감 되기도 했고 미군 부대에서 불하받아 송탄시내  유일의 엠블란스까지 팔아서 합의해 줘야하는 상황에 당신의 소신을 꺽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수도없이 겪은 배반은 그러려니 하시고 넘겼겠지만 결정적으로 몰 염치한 인면수심에 눈물을 삼키지 못하고 서럽게 우시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결국 송탄하고도 쑥고개를 떠나지 못하셨습니다

애증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아버지에게는 미군들이 술취해 건들거리고 성병에 무방비로 지 어린 몸을 팔아 먹고 사는게 최 우선인 이 도시가 어쩌면 제일 보기 싫고 떠나고 곳이기도 했겠지만 이대 독자 외 아들이 대 끊긴다고 내 몰듯 배를 태운 늙은 부모님 남겨두고 혈혈 단신으로 한 가족을 이루고 뿌리를 내린곳이라 남 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좌판 노인네들 보면 그렇게 모친과 머리 털 빠지게 싸우면서도 그냥 넘기고 모른척 지나가질 못했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지요


그때 송탄이란 곳은 지금 문우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예산 할매 집으로 가기전까지 기억하고 학교 다닐적 가끔 아버지를 뵈러 갔을때 기억하는 송탄 우리집과 병원 아니 의원은 매주 두번 이층 병원은 갈수도 없고 아버지에게 걸리면 완전 초상 나는 날 이었지만 안갈수 없는 유혹 완빵인 완전 보물이 숨겨진 숨바꼭질 창고였습니다

아버지가 금지한 날은 병원에 돌아가신 분이  계시거나 일주일에 두번 양공주 누나들이 미군들 접대부를 하기 위해 성병검사를 받는 일명 검진을 받는 날이었습니다

보건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일반 병의원에 그 역할을 맡긴 덕에 생긴 진료이긴 했지만 나로서는 최고였습니다

제가 아버지 몰래 가는 날이 왜 검진날이냐 하면 누이들이 이쁘다고 주는 껌 초콜릿 사탕 케익뿐 아니라 스팸 빠다 장난감등 종류 불문 그 가짓수가 엄청 났거든요

솔직히 누나들 복장이나 말투는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누이들이 제가 오던 안오던 싸들고 가져온단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제가 없으면 병원 대기실에 놓고 간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던거지요

나는 거기서 가지고 싶고 먹고 싶은것만 살짝 들고 나와서 친구들에게 줄서라고 하면 뭐든지 다 듣는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거든요


당신은 시장 좌판 어른들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가족 대신 미군 접대부 노릇을 하는 양공주 들이나 나이 먹고도 미군 부대를 떠나지 못하는 늙고 몸 망가진 양공주 누이들을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정말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주고 계셨다고 합니다

어쩌다 마음 착한(?) 미군들과 눈이 맞아 미국으로

결혼해 가는 누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자기 애까지 팽겨치고 지 나라로  도망가 버리는 미군들이 더 많아 상처받고 버려진 누이들이 더 많았거든요

그런 아버지 고집대로 사시던 삶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피해가 있었는지 아직도 솔직히 모르지만 전 그냥 아직도 아버지 하는 단어만 그리고 떠올려도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가슴이 먹먹 합니다

그냥 의미 없는 아버지라는 말에도 말이지요


하지만 어디에도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발자국 뿐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좌판 쭈글해진 손으로 나물 다듬는 할매들도 시장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반바지에 나시티만 걸치고 가슴을 다 들어내놓고 우리들을 놀리던 누나들도, 찐한 화장 기 속 눈섭 길게 부친 누나들도 없고 정 많던 깜둥이 미군들 대신 양아치 같이 한국인 눈탱이 치는 미군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것 같이 보입니다

자식은 여기서 못 키운다고 빚 내서 외지로 유학 보낸 대신 손마디 휘도록 미군들 술주정 받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자리를 어른들의 땀내나는 옛 향기 대신 겉 멋 들은 햄버거 추억을 채우고 있습니다

새로운 발자국에 묻힌 아버지의 발자국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젠 자식인 나밖에 없다는 사실도 조금은 괜히 서글퍼지는것도 같았습니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병원 2층 입원실 에서 홀로 생활 하셨고 말년에 우리집으로 오셔서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자조적으로 말씀하신것 처럼 낙태 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 벌 받는거라지만 이렇게 벌받을 바에야 내새끼들을 좀 더 챙겼어야 했다고 후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압니다

당신이 당신 뜻대로 그렇게 사신 삶은 당신 말대로 꼴랑 집한채가 정말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굳이 따지고 든다면 어쩜 당신만 모르고 가신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대 독자 외아들의 아들들의 지금 관계가 어쩌다 이 모양 이꼴로 형제간 의마저 끊어졌는지 몰라도 망나니에 꼴통이지만 늦게 철들어서 다른건 몰라도 부모한테는 효자라던 큰아들 내외가 지옥에 떨어질 년놈인지 어떤지는 이젠 정신에 병이 들어 버린 모친만이 진실을 아실겁니다

당신도 거기서는 정확히 아실테니까 더 이상 못난 변명은 하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잘났던 못났던 아들 셋을 두었고 신문과 인터넷 상이름 석자가 남아 있는 아들 둘과 손녀 다섯과 손주 하나를 두셨으니 할아버지 할머니 뵙고도 대 안 끊었다고 큰소리 치실수 있으니 되었고 아버지 살아생전 평생 모은 재산이라는  집한채보다 강남 분당의 몇십억짜리 집에서 사는 두 아들이 있으니 그 또한 후회 안하셔도 될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고만 치고 걱정만 시키던 큰 아들이 눈에 밟혀 하신 말씀이겠지만 아버지는 아실겁니다

두 손녀 딸들이 못난 아빠 부끄러워하지 않고 되레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렇게 길러 주시고 격려해준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매년 기일을 잊지않고 작지만 정성스런 꽃 한송이로 아버지를 기억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요


60년대 중반 송탄 제가 살던 집은 일명 쑥고개라고 불리던 오직 미군부대로만 드나들기 위해 만든 서정동과 신장동 사이에 있던 철뚝길 옆 곧 허물어 질것 같은, 군 부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철뚝길 철문 옆에 여인숙과 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동네에선 두칸과 마루가 있는 본채와 부엌으로 이어진 작은 방 두칸이 연이어 있는 마당에 넓은 평상이 있는 동네 사랑방 같은 집이었습니다

사립문 하나 차이로 한쪽은 평상에 모여 앉아 동네 몇대 안되는 TV를 보려고 몰려든 동네 사랑방에다 응급 병원을 필요로하는 미군들의 힘(?)으로 하얀, 깜장색도 아닌 하얀 전화가 있어 동네 대소사를 모를래야 모를수 없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판자대기 한장 달랑 문이라고 만든 사립 문 밖의 여인숙에는 집 없는 늙은 양공주 누나들이 애꿎은 담배를 연거퍼 태워대고 있었고 가끔씩 들리는 깜둥이 미군들이 오가며 던져 주는 초콜릿이나 껌 쪼가리 얻어 먹으려고 언제나 동네 꼬마들도 진을 치고 미군들을 기다리기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나 드라마 에서 본것처럼 미군 앞에서 땟국물 흐르는 손을 내밀며기브 미 조코랫 기브 미 조코랫 하다가 뒤지지 않을만큼 아버지에게 맞았던 기억도 있고 그러다 예산 할매집으로 쫒겨간 사실도 기억 납니다


삼보 극장과 아케이드가 있던 여관 자리는 이미 없어져 버린것은 알았지만 당숙의 배다른 형님은 당숙 사후 모든걸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 조그만 흔적조차 없었지만 군데군데 남아있는 아버지의 기억들은 아직도 냄새가 나는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버지가 원하시던대로 굳이 송탄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버지의 고향분이라는 이유 하나로 자기네 건물  식장에서 무조건 해야한다고 우긴데다가 완공 후 첫 결혼식이라 뭐든지 다 공짜였던 기억이 납니다

시골 결혼식 하객은 시장 좌판 할머니들과 상인들 양공주 누나들 미군들 동네 가게 아줌마 아저씨들 하객들이 많아 식사 대접과 선물 지급까지 하는데 삼층식당이 오전 11시 예식이 끝난후 저녁 해질 녘까지 계속 되었다고 들었고 천원 이천원 들고온 할매들의 축의금부터 동네 유지 정치인들이 보낸 축의금까지 합해 87년 당시 금액이 지금 들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축의금 금액을 확인 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마 철길 안쪽부터 미군부대 정문이 있던 지금의 송탄 관광 특구가 되어버린 지역 분들이 거의 다 오셨던것 같고 천원을 축의금으로 내고도 식사 드시고 밥그릇 세트 선물을 받아가면 안된다고 손사래 치는 시장 좌판 어른들에게 한분 빠짐없이 그리고 모자른 것까지 구입해 나눠 주신 아버지의 마음을 말입니다


너무 늦게 왔나 봅니다


기억 희미한 속에서도 아버지따라 다니던 철뚝길 끝 서정리역 못가서 있던 도살장 옆 유치원 모습은 커녕 위치조차 찾을길 없고 송북동 야산 상여집도  없어졌지만 밤나무는 여전히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숨어 있어 떨어진 밤송이를 주어와 까주던 아버지 발걸음을 낙엽 속에 감추고 있다 반겨 주더라고요

아무것도 밟히지 않을것 같은 하루해 마지막 선물 같은 추억인 봄비 내리는 날 보이지도 않고 줍는 내 아버지의 알밤을요

알밤을 줍다보니 어느새 보이지 않는 다시 철뚝길

결혼식을 올린 예식장은 당연히 없어져 버렸지만 아직도 옛 모습 숨긴 성당은 그대로 두 눈속에 남아 아는척을 하고 있고 동네 악동들과 뛰놀던 철길 양 옆 벽에는 다소 웃기는 그림들이 성의 없이 그려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게 왠지 모르게 낮설고 슬픈 눈물 냄새가 나는것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와 같이 보낸 짧은 송탄 서정리 일명 쑥고개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신기하리 많큼 기억나는건 아버지 손에 들린 냄새가 거의 전부이고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는 것 입니다


가끔 당신은 집으로 돌아 오시며 사온 전기 통닭과 길거리 햄벅(?)과 튀김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래서 직접 가 보았습니다

송탄 신장 중앙시장 골목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중 하나인 돼지네 가게 뒤에 있던 이름도 묘한 김네집 부대찌개는 갈때마다 먹던 맛집 중 하나이예전 신장동 철길 옆 골목 입구에 있다가 지산동으로 이전한 태화루 짜장면과 탕수육 갑자기 소사로 이사해 옮겨간 쌍둥이네 중국집이 생각 나더라고요

당연히 다 없어졌고 지금은 철뚝길이 유명해졌다고 하지만 예전같은 따스함은 없어지고 인위적인 그림 앞에 맛 없어지고 요란해진 햄벅과 겉 멋 잔뜩 들은 부대찌개들과 부대 정문 앞에 늘어서 있던 튀김 구라마들을 사라지고 없어 아버지 손에 들려져 있던 아버지 냄새를 맡을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가게를 이어 받은 자식들과 가게안의 희미한 기억속의 얼굴들은 볼 수는 있었지만 굳이 마주할 추억이 아니어서 돌리는 발길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습니다


자식은 그렇게 많은 이사를 다니는 동안 당신은 함흥서 배타고 내려와 가마떼기 덮어쓰고 공부하고 뿌리를 내린 곳에서 미련스럽고 고집스럽게 사시다 가신 발자국과 냄새는 허무하리 만큼 흔적도 없어 당황스럽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아버지를 기억하는 못난 자식이 이제서야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보며 거칠었던 삶의 흔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 하실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고 말이죠

뭔가 손에 잡히질 않아 짧은시간 혼란스럽지만 괜찮습니다

괜찮아 질겁니다


갑자기 공부하고 싶어져서 대학 삼학년부터 대학원 2년 합해 4년동안을 원없이 공부 해봤고 또 갑자기 결혼 안하고 혼자 놀며 산다던 마음은 어디로 내다 버리고 결혼해 큰 녀석이 안해의 뱃속에서 발길질 엄청 한다는걸 알고는 또 갑자기  벌고 싶어져서 공부 때려치고 돈 벌어 아버지께서 우리들 아무런 불평이나 말 없이 키워 주신것처럼 저도 회사에 들어가 27년 동안 죽어라고 돈도 벌어본 것 같습니다

이사 다니는게 싫어서 결혼후 37년동안 딱 두번 아니 같은 아파트에서 지금의 큰평수로 옮겼으니까 세번 이사 다녔고요

아버지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꼴랑 집 한채가 다는 아닌것도 닮아 버린것도 같고 말입니다

지나고 보니 아니 아버지 발걸음을 따라 걷다보니 아버지가 간 길을 따라 걷는 줄 몰랐는데 제가 지금 웃기게도 아버지 발걸음을 따라 걷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이제부턴 제가 나머지 발걸음을 만들면 될테니까요

양심도 부끄럼도 모르는지 몰라도 이제부터라도 죽어라고 발자국을 만들어 볼테니까 말입니다




      2024-6-9   바보는 전기 통닭이 생각 납니다



한번 그리면 다시 덧칠은 안하는 편인데 끊었다 다시 쓰고 끊었다 다시 쓰다보니 그림이 한강에 갔다가 남산에 서 있고 홍길동이 따로 없네요

홍길동전 쓰는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무튼

이 그림 하나 그리고 덧칠하는데 20일이 넘었는데 아직도 볼때마다 자꾸 더 덧칠할데가 생겨나네요

그러면 그리고자 했던 원래 그림이 없어 지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대로 마침표를 찍으렵니다

하고픈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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