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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un 11. 2022

문하수(文河水)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내 논문을 대중서로』

“선생님, 그래서 박논은 언제 책으로 내시나요??”

     

 좋아하는 선생님들을 뵐 때마다 이렇게 여쭙곤 한다. 훌륭한 연구들을 빨리 책으로 읽어보고 싶어서다. 물론 박논을 인쇄해 스프링제본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소위 ‘읽는 맛’이 살지 않는다. 그렇게 뽑아만 놓고 사물함에 쌓아둔 박논이 한 트럭이다. 게다가 박논은 “역사책 달리기”에 써먹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거칠고 딱딱한 논문이 아닌, 전문적인 편집을 거친 유려한 책을 원한다.

 

선생님...!! 박논은 언제 책으로 내시나요??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아, 제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요...” 박사까지 따셨는데 공부가 부족하다면 대체 얼마나 더 공부해야 책을 낼 수 있는 것일까? 5년? 10년? 일단 책을 내셔야 연재에 써먹는데, 나는 10년 뒤에도 “역사책 달리기”를 연재할 수 있을까? 아니, 다 떠나서 과연 10년 뒤에 책이란 게 남아있을까? 연구자가 아닌 독자인지라 이런 속도 모르는 얘기를 꺼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결국 세상에 널리 읽히고 도움이 되라고 하는 연구일진대, 좀 ‘쉽게’ 내주시면 안 될까?


 손영옥의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다. 지은이는 문화전문기자이자 미술평론가로, 박사논문인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2015, 서울대)를 다듬어 『미술시장의 탄생』(2020, 푸른역사)을 퍼냈다. 기사와 논문, 평론은 물론 『한 폭의 한국사』(2012, 창비)처럼 청소년을 위한 교양서까지 쓴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책이 나온 푸른역사는 ‘대중학술서’란 말이 등장하기도 전에 이를 교양 독자에게 선보이며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역사출판계의 명가. 지은이의 패기와 출판사의 안목이 다시없을 책을 만들었다. 


손영옥의 『내 논문을 대중서로』


 지은이는 『미술시장의 탄생』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려는 마음이 책을 쓴 동기가 되었노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 책은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뼈대로 삼고 있는 만큼, 읽다보면 감질나서라도 『미술시장의 탄생』을 한 권 사보고 싶어진다. (내가 그랬다!) 하지만 『내 논문을 대중서로』가 단순히 『미술시장의 탄생』의 홍보책자나 미끼상품만은 아니다. 전방위 글쟁이 손영옥이 아니라면 결코 들을 수 없었을, 유용하고 구체적인 ‘꿀팁’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책의 뼈대가 된『미술시장의 탄생』


 바야흐로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은 시대다. 이들 예비 작가를 위한 글쓰기 교본은 이미 쌔고 쌨다. 비단 ‘글 잘 쓰는 법’이 아니라 서평, 동화,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형식과 내용에 맞는 교본을 골라잡을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시장’은 포화 상태다. 그렇기에 이런 유의 책은 소위 ‘예제’와 ‘풀이과정’이 얼마나 상세한가에 성패가 판가름된다. 잘 팔리는 수학문제집도 다들 개념설명보다는 풍부한 문제와 자세한 해답을 기대하며 사보는 게 아니겠는가.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이 점에서 아주 독보적이다. 솔직히 손영옥이 제시하는 ‘꿀팁’은 그렇게까지 새롭지는 않다. 쉽게 쓰고, 스토리텔링으로 흥미를 돋우고, 편집자를 믿으면 된다. 대신 지은이는 풍부한 예제와 풀이를 통해 이 뻔한 과정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냈다. 앞서 이야기했듯 지은이가 박사논문을 대중학술서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이 이 책의 뼈대지만, 당연하게도 지은이는 자신의 책과 논문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최효찬의 『일상의 공간과 미디어』(연세대학교출판부, 2007)나 이성낙의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눌와, 2018), 송은영의 『서울 탄생기』(푸른역사, 2018)처럼 박사논문을 토대로 만든 다른 교양서도 적극 참고했다.


손영옥이 『내 논문을 대중서로』를 쓰는데 참고한 책들


 단순히 이런 책도 있다며 슬쩍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다. 지은이는 자신의 책을 비롯해 참고자료로 사용한 모든 책들을 꼼꼼하게 해부한다. 목차를 비교하고, ‘꿀팁’이 어떻게 반영됐는지 일일이 찾아 대조하는 등 박사논문과 교양서를 부지런히 오간다. 얼핏 봐도 품이 꽤 많이 들었을 것 같은 작업이다. 여기에 더해 문화전문기자로 일하며 겪거나 들은 수많은 에피소드가 군데군데 감초처럼 들어가 있다. 심지어 마지막엔 (이 역시 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겠지만) 《한겨레》 이유진 기자와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의 『미술시장의 탄생』 서평까지 실었다. 논문, 학술서, 교양서, 기획서, 서평을 넘나드는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이러한 충실함은 책을 지은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방향으로도 읽게 해준다. ‘논문을 대중서로’ 바꾸려는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서를 논문으로’ 바꾸려는 기자나 칼럼니스트에게도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 한 번도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내가 책을 읽으며 마음에 새긴 대목도 (지은이가 그런 얘기를 쓰진 않았지만) 칼럼이나 서평 쓰듯 논문을 쓰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흠모하는 고태우나 정일영처럼 유려하고 문학적인 논문을 쓰는 연구자도 있으나, 최소한 학술적인 글에 걸맞은 문장과 구성, 전개가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꼭 글을 쓰려는 사람들뿐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단언컨대 읽기에 대한 가장 쉽고 훌륭한 교양서라 할 수 있는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김성우와 엄기호는 ‘탑 쌓기’가 아닌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매체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고 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잘 읽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주로 영상과 활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다양한 활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이 아니다. 어떤 내용을,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구성과 전개는 물론, 문체와 예시까지 달라진다.

     

김성우와 엄기호는 '탑 쌓기'가 아닌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이야기한다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글이 가진 그러한 결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서다. 마치 빛을 분산시켜 여러 색으로 펼쳐내는 프리즘처럼, 이 책은 하나의 이야기가 장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친절하고 자세하게 보여준다. 장르에 따른 글의 특성을 파악하고, 여기에 맞춤한 읽기를 연마해간다면 ‘논문을 대중서로’든 ‘대중서를 논문으로’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잘 쓰는 법에서 시작해 결국 잘 읽는 법으로 되돌아오며, 다시 잘 오가는 법으로 나아간다. 연구자와 작가, 독자와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글의 바다를 여행하는 모든 히치하이커를 위한 발랄한 가이드북이 지금 막 도착했다.


『내 논문을 대중서로』는 글의 결을 보여주는 훌륭한 프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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