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1층보다는 높지만 2층은 아닌 것 같은, 조금 어정쩡한 201호의 쇠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록색 페인트가 벗겨지는 베란다 샷시가 가장 먼저 눈에 보인다. 방도 하나, 거실도 하나지만서도 거실은 그냥 큰 방으로 기어들어가는 좁다란 동굴 같다. 가스레인지엔 찌든 때가 잔뜩. 속으로 생각한다. "오우, 여기서 어떻게 살지. 이게 어떻게 전세 1.7억이지?" 옆에서 공인중개사가 말한다. "그 가격에 이정도 사이즈는 없어요." 이미 살고 있던 세입자도 덧붙인다. "4년 잘 살았는데 결혼해서 나가요." 흠. 그래, 이 집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집일텐데, 내 생각이 너무 부르주아 같았네! 크긴 엄청 크네! 어쩌면 중개사의 말이 그럭저럭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 가격에 이런 집 없어요."라는 말을 딱 정확하게 저렇게만 쓰는 공인중개사는 없다. '모든 사람은 제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진리처럼 '모든 집은 제각각의 매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집이 가진 최상의 장점을 저 문장에 갖다 붙여 쓰기 마련이다. 신축인데 좁고 답답할 경우 "그 가격에 이렇게 깨끗한 집 없어요." 쓰러져가는 구옥인데 엄청 넓을 경우 "그 가격에 이렇게 넓은 집 없어요." 탑층이라 덥지만 시야가 트인 경우 "그 가격에 채광까지 좋은 곳은 찾기 힘들걸요?" 등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항상 들으면 반문하고 싶었다. "진짜? 그 가격에 이렇게 좁은데? 그 가격에 이렇게 낡았는데? 그 가격에 이렇게 더운데? 진~짜? 당신이라면 여기 살거야? 대답해봐!" 하지만 좋은 매물이 나오면 나에게 연락해줄 사람이 공인중개사이니, 나는 "헤헤, 좋네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밖에.
집을 구하러 다니는 건 참 소개팅과 비슷하다. 아, 아니다. 소개팅이 집 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자본주의 시장에 주거가 먼저 들어왔으려나 배우자가 먼저 들어왔으려나. 아무튼 초면에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는 자리이고, 주선자는 장점만 말해주지만, 결국 첫 만남을 갖고나면 "오.. 제 능력으로는 이 집이(혹은 이 분이) 최선입니까?"를 마음 속으로 외치게 되는 그런 이치가 서로 통한다. 하지만 주선자가 또다른 소개팅을 물어올지 모르고 그 노고가 감사하니, "고맙습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렇게 생각해보면 인생의 모든 선택은 주제 파악, 우선 순위, 그리고 가치 판단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집을 보여주겠다고 공인중개사를 따라 갈 때면, 언제나 소개팅을 하는 것마냥 설레였다. 가는 길에 공인중개사님이 "그 가격에 이런 집 없어요"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더욱 설레임이 폭발하였다. 그 말에 몇 번을 당한 줄 알면서도! 혹시 몰라~ 지금 보러가는 이 집을 계약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마지막 집이자 계약할 집 빼고 앞선 모든 집들이 나를 실망시키고야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이다. 그 마지막이 빨리 오길 기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고, 매번 실제로 대면하기 전까지는 속을 수 밖에 없는 말이다.
결국, 뭐든 실물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