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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S Mar 25. 2024

할머니와의 작별

[ 1930.08.22~2024.03.20 ]

"너 낳았을 때 집 앞에 지나가는 강아지에게도 자랑하고 싶더라" 


할머니가 저를 보면 자주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가끔 동생들에게 민망할 만큼, 할머니는 장손인 제가 태어났을 때 가장 기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첫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의 마음에 더에, 제가 태어나기 2년 정도 전 할아버지/할머니의 셋째아들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기에 가족이 한 명 늘어났다는 것이 훨씬 더 큰 기쁨과 위로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저는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어린시절 할아버지/할머니의 유럽여행에 함께 가기도 했고, 외국에 오래 나갈 때 저를 위해 모아 두셨던 돈을 주기도 하였지요. 2005년까지 지내셨던 면목동 그리고 그 후 사셨던 죽전/병점 어디든 할머니댁에 제가 가면 굉장히 반가워 해 주셨습니다. 


2009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삶에 대하여 손자인 제가 정말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의 인생사에 대해서 종종 물어보고 정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도, 할머니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살아왔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살아온 시대를 감안하여 할머니도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가지셨다고 생각했으나, '남자는 밥상 여자는 바닥'에서 식사를 했던 에피소드 등을 나누시며 "그 때는 여자를 정말 무시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여운형/김성수의 집과 가까웠던 계동에서의 어린 시절도 들었고, 키가 커서 농구할 때 센터로 활약했던 사연도 들었습니다. 제 산수 실력이 누구에게 유전인지 몰랐는데, 할머니에게 유전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이화여대를 갈 수 있었으나 새어머니가 부담스러워서 고향인 양평으로 내려와서 국민학교 선생님을 했다거나, 한국전쟁 때 급하게 남쪽으로 피난갔던 이야기 등도 들으며 할머니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의 중요한 추억들도 들을 수 있었죠. 할머니 집안의 문화와 다르게 결혼 후 맞는 첫번째 생일을 안 챙겨주셔서 섭섭했던 일, 증조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문상객에 따라 종교 표시를 바꾸었던 일, RCA TV를 사서 대문을 열어놓고 동네 사람들이 같이 드라마를 보았던 일 등등.  2020년 이후 조금씩 치매 증상이 오신 후에는 말씀해주시는 내용이 흐릿해지거나 섞이기도 하였는데, 그 전에 큰 틀은 들었기에 할머니의 삶을 좀 더 풍성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말을 참 이쁘게 하시는 분이셨고, 가족과 친척들에 대한 애정이 많으신 분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분이었습니다. 다른 어르신들도 그러하시겠지만, 댁에 갈 때마다 항상 먹을 것 등 무언가를 가져가라고 내어주시기도 하셨고요. 그렇게 주변에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할머니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타이밍도 있었고, 애정으로 주시는 반찬을 제가 좋아하지 않아서 식사를 피해다녔던 적도 있습니다, 용모단정을 선호하셨던지라 찢어진 청바지를 꿰매주시기도 하여서 할머니댁에 갈 때는 옷을 신경 써서 가기도 했지요. 그래도 할머니의 마지막 몇개월은 시간을 자주 함께 보내며, 정신이 희미해져가는 가운데서 요청하셨던 내용을 해 드리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감사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며칠간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으며, 할머니가 생각하는 것만큼 제가 괜찮은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듯 해서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삶을 마무리하기 얼마 전부터는 저런 고통을 오래 겪으시기보다는 빨리 평안하게 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더 이상 할머니 옆에 누워서 '우리 호석이'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들 수 없다는 상실감에, 그리고 추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눈물이 차오를 때가 한동안은 적잖게 있을 듯 합니다. 


작별하실 때까지 주신 만큼을 제가 채울 수는 없겠지만, 할머니를 기억하며 지금보다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업로드한 사진은 몇 년 전부터 지갑 속에 넣고 다닌, 제가 가진 사진 중 할머니(한춘동님)와 가장 어릴 때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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