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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Apr 22. 2024

서류 접수 하던 날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다양한 착장이 공존하는 시기다. 반바지를 입기엔 다소 이르다고 생각되지만, 부슬부슬한 비가 내리고 있어서 무릎 위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블랙진을 입고 화이트 반팔 티셔츠 위로 도톰한 블랙 후디를 걸쳤다. 블랙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직접 만든 블랙 에코백을 어깨에 들쳐 매고 집을 나섰다.   

   

당연하다는 듯이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탔고 10번 출구가 어딘지 몰라 조금 헤맸다. 온통 블랙으로 휘감은 채 미로같이 복잡한 건물 틈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 길 위에 서 있었다. 길치는 지도를 봐도 잘 모른다. 마침내 웅장한 법원 건물 앞에 다다르자 반바지를 입은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요즘은 이혼도 오픈런을 해야 된다는 기사를 읽고 피식 웃으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서류접수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예닐곱도 안돼 보였다. 관공서의 분위기는 언제나 사람을 주뼛거리게 했고 직원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작성하고 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렸다. 약속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이곳에서만큼은 타인을 관찰하고 싶지 않지만 두 눈과 귀가 제멋대로 작동한다. 늙으나 젊으나 한결같이 표정이 어둡다. 당연한 일인가? 거울을 꺼내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그렇다고 볼 수 없는 듯한 얼굴이다. 실제로 나는 이곳에 협의이혼 접수를 하러 왔다기보다는 통장 개설을 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약속시간으로부터 7분이 지나 그가 도착했다. 거의 1년 만에 정면으로 얼굴을 보는 듯하다. 매일 영양제를 9개나 챙겨 먹으면서도 얼굴이 흙빛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유독 시꺼멓게 변했던 까무잡잡한 얼굴을 보면서 왜 화난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내게 화를 내는 걸까.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그에게 건넸고 대기표를 뽑았다. 그가 서류 작성을 마침과 동시에 띵동 접수처의 알림이 울렸다. 주민등록등본과 각자의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를 첨부해서 서류를 제출하고 신분증을 확인받았다. 내 얼굴과 신분증의 사진을 번갈아 보는 직원의 눈빛이 다소 의아스러워 보여서 주소지가 변경되면 신분증 사진을 다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 뒤에 다시 방문하라는 연두색 종이 쪼가리를 받아 들고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들어올 때 헤맸던 것과는 달리 출구가 곧장 찾아진다. 지도 앱을 열고 ‘서울왕돈가스’를 찾아보았다. 그렇다. 나는 돈가스를 먹으러 갈 참이다.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를 접수하고 근처 돈가스 맛집을 향하는 나. 돈가스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나. 이런 나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서울왕돈가스는 헤매지 않고 단번에 찾았다. 내가 착석한 뒤로 줄줄이 사람들이 들이닥치고 대기 줄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법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 계속 착착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경양식 돈가스를 좋아하는 내게 이 집의 돼지고기는 다소 두꺼웠고 소스는 모자란 듯했지만 소스를 쓱싹쓱싹 긁어가며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먹어치웠다. 거울을 꺼내 입가를 살피는데 양 볼이 발그스름하고 광대에 광채가 흘러서 흠칫 놀랐다. 광채가 나야 할 사람은 마땅히 그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술에 취한 채로 낄낄거리며 웃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이제 와서 저딴 얼굴로 나타나는 것인지. 나는 끝까지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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