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Jun 25. 2024

버스 정류장을 찾아서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견디고 버티고 나아가고 싶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탄식을 내지르며 어딘가에서 주섬주섬 우비를 챙겨 입기 시작했고 나는 쏟아지는 비를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고 서 있었다. 덕분에 뜨거운 태양 빛에 달구어진 몸뚱이의 열기가 한 꺼풀 식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가학적으로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피하지 않고 즐기는 자의 평온함이 이런 것이라면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 자수 전시를 보고 나서도 전에 없던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하고 거대한 작품들은 내게 전혀 감동을 주지 않았다. 하나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 작품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신기해하는 사람들 뒤에서 최대한 건조하게 작품들을 보려고 애썼지만 보는 내내 어쩔 수 없이 괴로워졌다.      


일개 프랑스 자수를 취미로 가진 나도 자수를 놓는 그 무수한 시간에 대해 알고 있다. 자수 작업은 즐거움보다는 인내와 고통이 훨씬 더 많이 뒤따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고통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들이 견뎌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무엇이 저렇게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작품을 만들게 했을까. 나는 그 거대한 작품들이 고통의 덩어리로 느껴져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전시를 찾기 전에는 창의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길 기대하며 다시 자수라도 시작해 볼까 싶었지만 정작 전시를 보고 나서 다시는 자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견디고 버티고 나아가고 싶었다.  

   

‘귀하께서 ooo구청에 접수하신 신고가 처리 완료되었습니다. -ooo구 민원여권과 가족관계등록팀’   

  

어제 비로소 이혼이 처리되었다는 문자를 받았고 재산분할 문제로 또 전남편을 만나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늦겠다는 그의 전화를 받고 구청에 비치된 대형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제야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그리고 내가 내게는 사과를 하지 않는 그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속이 있을 때마다 1시간씩 늦게 와놓고선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다는 오래전 내가 생각났다. P와 K는 뭐 저딴 애가 있나 싶어 화가 났다고는 했지만 정작 한 번도 싫은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때의 기억을 상기해 보면 나는 그들이 내가 올 때까지 당연히 기다려 줄 것이라는 이기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굳이 잘못을 사과하지 않아도 내가 참고 넘어가리라는 믿음을 축적해 왔나? 그리고 나는 내가 그에게 사과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P와 K는 ‘저딴 애’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지만, 내가 해온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었을까.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가 묻는다.      


-차 타고 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됐어. 

-여기 길 모르잖아.

-응. 몰라.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라도 데려다줄게.

-아니 됐어. 여기 근처에서 밥 먹고 갈 거야.

-그럼, 같이 먹을래?

-아니.

-... 어디로 나가는지는 알고 있어?

-몰라.

-저쪽으로 나가면 돼.

-그래.

-그럼 가라.

-응.     


그가 굳이 어린아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출구를 알려주는 건 내가 심각한 길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그가 알려준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길을 찾을 것이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 배웠던 함께 식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마지막 장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같은 집에서 서로의 존재를 소리로 느끼고 있을 테지만 이것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가능하다면 이번 주 이사를 할 때까지 어떠한 마주침도 대화도 없기를 내가 기억할 만한 장면 따위가 더 이상 연출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낯선 동네의 버스정류장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작가의 이전글 고작 핸드폰 하나 바꾸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