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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80년대생의 회사생활

출근, 일주일째

by 윤비

7월에 트렁크 하나를 끌고 서울에 왔을 때와 슈퍼 싱글 침대, 2인용 소파, 의자 2개, 작은 다이닝 테이블, 소파 테이블, 사이드 테이블 모두를 1.5룸에 꽉꽉 채워 넣었을 때의 감정은 사뭇 달랐다. 정말로 이곳에서 살게 된다고?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 감정이 불현듯 뛰쳐나오는 걸 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틈만 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궁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작년 서울 재즈 페스티벌을 보고 묵었던 끔찍한 숙소가 이 동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런 곳에 있다간 살해를 당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 이곳은 오피스텔도 많고 모텔도 많아서 퇴근길에는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고 엘리베이터에 다다를 때면 다른 이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나라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이곳에 산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이런 무서움은 업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 업무에 대한 두려움이 지금의 가장 큰 고통이다. 줄곧 아우터를 디자인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너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힙합을 하던 사람이 트로트로 전향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매 순간이 도전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아득해서 출근 3일 만에 아침부터 로또 1등이 21명 나온 곳에서 로또 5,000원어치를 사는 대범한 소비를 했고(평소엔 1,000원만 구매한다) 점심을 최대한 많이 먹는다.


앞서 2달간 몸담았던 회사와 비교하자면 사무실 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다. 회사 건물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별도의 인력이 있고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장소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역시 꽤 오랫동안 몇 개의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는 회사이고 오너를 비롯한 그의 자녀와 사위, 여동생이 회사에 포진해 있다.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다른 이들을 머슴 취급하며 상스러운 언어를 구사하는 건 앞의 회사와 동일하지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도 오너 일가들이 상스러운 욕설을 하거나 상대방을 멸시하는 언행을 구사하는 걸 보면 그들은 그것을 특권이자 권력이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볼 땐 그저 상스러운 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게 욕쟁이 할머니는 CCTV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디자인실 한가운데에 앉아 직원들을 감시하고 종종 남자직원들과 살가운 사담을 나눈다. 한마디로 이곳도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그동안 일을 잘한다는 평만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의 나를 보면 나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곳의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은 앞서지만, 머리와 몸이 따라와 주지 않는다. 몇 년간의 공백 때문일까. 아니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멍청이 었나. 회사는 이런 나를 너그럽게 봐줄 리가 없다. 집 계약을 2년으로 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주말 동안 익숙지 않은 프로그램을 공부하지만, 도무지 이 일을 잘해 낼 것이란 자신감이 티끌만큼이라도 생겨나지 않는다. 백수일 때는 먹고살 일이 막막해서 불안했는데 막상 취업을 하고 나니 업무를 쳐내지 못해서 모가지가 날라 갈까 봐 떨고 있다. 취업만 하면 앞길이 꽃길이 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다시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떠났을 때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세상살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마찬가지로 이 업계도 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힘들어진 상황이다.


집에 도착하면 밤 10시다. 공부도 해야 하고 글도 쓰고 싶지만, 침대에 누워 겨우 몇 글자 끄적이다가 잠에 들고 만다. 갑자기 싸늘해진 아침 공기에 마음이 일렁이고 지하철의 공기는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숨이 막혀서 여전히 여름인 것 같다. 나의 계절은 여름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의 계절은 겨울을 향해 가고 있다. 이렇게 나의 시공간은 7월부터 뒤죽박죽 제멋대로 흐르고 있다. 그 사이 몇 년이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기도 하다. 불과 몇 주 전에 부산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을 만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 모텔과 오피스텔이 즐비한, 언젠가 살해당할 것만 같은 동네 한구석에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가 이곳에 있는 내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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