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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Nov 23. 2020

위대한 딴짓의 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당신에게

올 해를 돌아보며


벌써 12월 달이 코 앞이지만 올 해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무릇 다르다. 무엇보다 브런치는 나의 소중한 대나무 숲이 되어주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 마음속 열등감, 수치심, 실패와 같은 미운 나의 이야기들을 글로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나의 성장을 막고 있던 상처를 잘 보듬을 수 있게 되었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나의 아픈 청춘인 첫 번째 스무 살과 미련 없이 작별할 수 있었다.



전업맘도 워킹맘도 누구 하나 쉽지 않은 엄마로서의 삶


여전히 육아와 가사에 나의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고 있지만 디스크 조각 모으기를 하듯 자투리 시간을 모아 의미 있는 일을 해보려 노력했다. 작년부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재취업은 현재 하루 5시간 재택근무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반은 성공했다. 근무 시간이 아이를 등원시킨 후 10시부터 아이가 하원 하는 3시까지라 육아맘에겐 완벽한 조건이다. 담당 업무는 아시아 국가 유통채널에서 판매되는 K-브랜드 관련 위조품을 조사하는 업무인데 과거 패션 MD로서의 기분을 살짝 맛볼 수 있어 좋았다. 7월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12월이면 끝이 나는 계약직이라 아쉽지만 전업맘인 나에겐 새로운 목표를 새울 수 있는 심리적 여유를 만들어준 일자리이기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위대한 딴짓의 힘


2020년 브런치는 나에게 잊지 못 할 선물을 주었다.



올 한 해 브런치에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위로받았다. 글쓰기의 과정은 정말 위대했다. 내 마음을 들어다 보며 그것을 스스로 헤아려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었으니 말이다. 부족한 글솜씨에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라고 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치유가 된다. 먼지 같은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니 이상할 만큼 새로운 힘이 생겼다. 나의 삶의 방향성이 밖에서 안으로 바뀐 것이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처럼 말이다.





보이저 1호가 1990년 2월 14일, 61억 km 떨어진 명왕성 근처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가 해왕성을 지날 때 원래 계획에 없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바라보게 하자는 제안을 NASA에 했다. 그전까지 우리는 지구 밖 우주탐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우주에서 지구의 존재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천동설을 믿은 중세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가 찍은 지구를 보고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이 먼지 같은 티끌이 우리의 보금자리고, 고향이고, 바로 우리다. 우리가 알고 들었던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인류가 여기서 살았다. 모든 즐거움과 고통, 모든 종교와 이념, 경제체제, 사냥꾼과 약탈자, 영웅과 겁쟁이, 모든 문명의 창시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희망에 찬 아이,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교사들, 부패한 정치가, 인기스타, 위대한 지도자들, 역사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이 우주에 뜬 먼지 같은 곳에 살았던 것이다."



"별들의 일생에 비한다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하다. 단 하루의 무상한 삶을 영위하는 하루살이들의 눈에는, 우리 인간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지겹게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한심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한편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일까? 아주 이상할 정도로 차갑고 지극히 단단한 규산염과 철로 만들어진 작은 공 모양의 땅 덩어리에서 10억 분에 1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중     

 



우주적 관점으로 볼 때 지구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그 속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바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정말 아이러닉 하게도 이러한 존재의 하찮음은 나의 부족함에 위로가 되었고 작은 성공의 오만함에 경계가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내 삶의 방향성이 타인의 인정이나 사회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 우주엔 흔적조차 남지 않을 테니깐. 세상에 잘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니 자유를 얻은 기분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할 때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온함이 없었다면 두 번째 스무 살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스무 살에게


목표가 생겼다. 두서없이 읽은 책들과 나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작은 노력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구슬들을 엮어 뭔가 쓸모 있은 것을 만들어 보고 싶어 졌다. 그것이 돼지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넘어졌던 지점인 관계의 바운더리를 공부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글도 한 달 동안 매진해온 토익 공부가 너무 지겨워 오랜만에 브런치를 열어 쓰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원하는 토익점수를 만들고 내년엔 심리학과 편입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마흔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니깐.

 





사실 이 모든 결심과 과정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토익 단어는 몇 번을 반복해도 장기기억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고, 주부의 삶 속에선 하루 중 공부에 쓸 수 있은 시간은 20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모의고사 6번과 가장 취약한 파트 5를 위한 유튜브 무료 강의가 전부였지만 오랜만에 목표가 생겨 마음이 설레는 경험만으로도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보통의 존재가 주는 위안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내 매일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나는 다시 스무 살이 되어 보려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해 애쓰던 과거와 달리 실패의 숲으로 뛰어 들어가 마음껏 오답을 경험하고 싶다. 60세가 되어 다시 내 삶을 돌아봤을 때 해보지 않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토익도 좋고 편입도 좋고 다이어트도 좋다. 내가 그리는 모습으로 삶을 살아 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누군가 삶에 지쳐 의지를 잃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분명 거기엔 상처 입은 과거의 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살지 못한 삶’이라는 그림자를 지금 내 품 속에 잠든 아들을 어루 만지 듯 찬찬히 드려다 보고 최대한 담백하게 글로 위로해주었다. 어쩌면 나의 그림자도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이해받고 싶지 않았을까. 나처럼 악필이라 노트가 두려운 사람에겐 브런치도 좋고 익명의 SNS도 좋다. 한 문장만 써보자. 새로운 문이 열릴 것이다.




*'살지 못한 삶’ 이라는 단어는 칼 융의 심리학 책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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