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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nna Vark May 21. 2021

무너져봐야 알 수 있는 것들

결국 문제는 '나(SELF)'였다.


기억은 기록이 아닌 해석이야. 기억은 방의 구조를 바꿀 수도 있고, 차의 색깔을 바꿀 수도 있어. 그리고 기억은 왜곡될 수도 있지.
-영화 메멘토-


2000년 극장에서 본 나의 최애 영화가 다시 개봉했다.


리셋증후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내가 실패한 지점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실패의 원인을 찾아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물론 가끔 덧없는 삶의 공허함에 그냥 포기하고 싶단 생각도 들었지만, 나에겐 아들이 하나 있다. 내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한편으론 행운이란 생각이 든다. 스무 살에 꿈꾸었던 화려한 삶은 아니지만 지금 여기 나에게도 몇 가지 선택사항들이 있다. 과거에 잡혀 살아갈 수도 있고, 주어진 지금에 맞춰 살아갈 수 도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몇 가지 단서들을 과거에서 찾아 현재의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여전히 나에겐 자극과 반응 사이에 선택의 기회가 남아있다.




너대니얼 브랜든의 자존감의 여섯 기둥




요즘 심리학 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키워드는 아마도 자존감일 것이다. 승자독식이라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더구나 SNS가 없었다면 알 수도 없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관음하게 되면서 우리는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삶을 강요받게 되었다. 그때 자존감이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처럼 다가왔다. 문제는 자존감이 부족해서 생기는 거라고. 그래서 나 역시 자존감에 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면 내가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말이다. 결국 자존감 부족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또 다른 강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자아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점은 정작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존감 대가인 너대니얼 브랜든이 말한 자존감의 여섯 기둥 중 하나인 자아통합의 밑바탕이 되는 진실성(도덕성)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점이다. 수많은 범죄자들이며, 표리부동한 정치인이며, 돈을 좇아 사람임을 잊은 수많은 전문경영인들을 생각해보자. 성공을 위해 소시오패스가 될 것을 권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나"에 대해 고민하고 돌아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약자가 되었다. 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말 치료해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피해자만 온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더 근본적으로 개인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의연한 호구의 삶

내가 ZARA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의 일이다. 우리 매장에는 남녀 매장 모두 합쳐 5명의 매니저가 있었다.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는 매장의 특성상 매장 마감과 다음날 오프닝은 웬만하면 같은 사람을 배정하지 않는다. 그게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은가. 2008년 ZARA가 처음 한국에 들어와 공격적으로 사업을 할 시점,  초창기 ZARA는 브랜드 이미지에 공을 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화 이벤트도 함께 했다. 한 번은 클럽에서 브랜드 파티를 열었는데 매니저들은 필수로 참석을 해야 했다. 참고로 내가 일했던 매장은 부산 서면이었고 클럽은 해운대, 우리 집은 부산 인근 위성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사 당일 마감과 다음날 오프닝에 배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까미온 데이라고 불리는 신상품이 들어오는 새벽에 말이다.


ZARA에서 반품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반품이 들어오면 매니저를 부른다. 나 역시 캐셔 포지션부터 시작했던 터라 그들의 어려움을 알기에 나의 콜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경험했던 ZARA는 어느 브랜드보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서를 가지고 있었다. TO DO LIST에는 30분 단위로 해야 할 일들이 배정되어 있었고 제법 업무강도가 높았다. 반품 과정에서 시간 손실이 생기면 다음 업무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반품 콜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매니저들도 있었다. 캐셔도 사람인지라 편한 매니저를 부를 수밖에 없으니 나를 찾는 소리는 끊임없이 흘러나와 매장을 채웠다.


나는 ZARA에 캐셔로 입사해 1년 만에 매니저가 되었다. 빠른 시간에 매니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의 선한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MBTI 성격유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INFP성향을 설명한 동영상 댓글에서 본 수많은 간증들은 나에게도 일상이었다. 민감성 높은 성격 때문에 외부의 작은 기류 변화를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민감한 정서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 빈번해 관계에 대한 피로도가 높다. 그 무렵 나는 점장 교육을 마쳤고 한창 매장을 공격적으로 오픈하던 시절이라 다음 오픈 매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기 세일이 끝나는 시점에 즉, 매장에 가장 영향을 주지 않는 시점에 맞춰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제 연봉다운 연봉을 기대할 수 있는, 앞으로 나의 직업적 선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 순간에 말이다. 내 나이 서른이었다.


내가 ZARA를 그만 두기로 결심했던 이유는 지역 매니저인 그녀의 지분이 꽤 컸다. 점장 교육까지 마친 나로서는 그녀가 나의 직장 상사였다. 그녀 역시 매장 매니저 출신으로 ZARA에선 매장 매니저 다음 목표하는 포지션에 다른 매니저보다 빨리 승진한 것이다. 마흔이 된 지금은 상사의 미움은 불편하지만 제법 흔한 레퍼토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 경험해보는 것은 힘이 든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녀의 차별과 변덕, 억지에 나는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퇴직의 의사를 회사에 건네고 인사과 직원분과의 마지막 미팅에서도 나는 그녀 악행을 말하지 못했다. 나도 안다. 내가 호구였다는 사실을. 그녀도 누울만한 자리였기에 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바꿀 수도 없었다.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을 읽어도 무수한 자기 계발 강연을 들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 것은 나의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요령이 생겼다면 그것은 그런 상황에 내가 개입되지 않게 최대한으로 환경설정에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성실히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유능함도 있었다. 하지만 타인과의 대치점에서 나를 지키지 못했다. INFP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현실이 될 수 없으니 내가 넘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개인마다 다른 도덕적 민감성은 어디에서 기인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역치를 높일 수 있을까. 무디게 만드는 것이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인가.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교육심리학에서 배우는 피아제의 도덕성 발달이론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이 될 수 있을 만큼의 특이성이 없었다. 유아의 성장과정에서의 몇 단계로 구분한 개론적인 설명으로 개인의 차이를 설명하기엔 불가능했다. 나는 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우리가 말하는 한 개인의 총합인 자아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심리학으로 본 자아

무의식의 아버지인 프로이트를 먼저 찾아보았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나의 무의식의 발달과정을 이해하고 싶었다. 특히 만 6세 이전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그의 이론을 토대로 나의 어린 시절을 하나씩 따라가 보았다. 프로이트는 마음을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라는 세구 조로 나누어 설명했고 세 가지 마음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여러 가지 불안이 생성되고, 자아가 수용할 수 없는 충동을 의식하기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만든다고 했다. 나의 경우는 내가 되고 싶은 초자아(superego)가 너무 비대해 생긴 문제였다. 융의 이론으로 보았을 때 수치심이 문제였다. 이상적으로 설정된 나의 페르소나 뒤엔 나의 열등감이 있었고 그와 함께 수치심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설명도 융의 설명도 딱 거기까지였다.

프로이트의 의식 체계


칼 융의 의식 체계

 도대체 나의 과거의 경험은 어떠했길래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란 말인가? 현재 우리 과학의 수준으로 정확하게 구현할 수 없는 양자의 세계처럼 무의식은 현재 우리 의학의 수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뇌의 자동 시스템 영역이다. 그곳엔 분명 자극과 반응이 있을 것이다. 그 반응의 개연성을 찾을 수 없다면 더 이상의 파악은 불가능하기에 나는 다시 인간의 의지와 본성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철학의 숲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철학으로 본 자아

철학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자기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등장한 근대적 합리주의자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며 객관적 사유의 중요성 강조했다. 테카르트는 감각기관으로 인식하는 세상이 환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철학적 사유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 설정이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 자크 라캉의 기표와 기의,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 눈에 들어왔다.


형이상학적인 현상을 내제화 하는 과정




뇌과학으로 본 자아

이는 우리가 감각 기관을 이용해 외부의 자극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형상하는 과정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오감을 바탕으로 우리가 인식한 자극이 뇌의 전기 신호로 바꿔 머릿속에서 다시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과정에 대한 뇌과학 관련 책들을 탐독하게 되었다. 결국 자아를 인식한다는 것은 장기기억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불러내 생각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자아는 형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세스인 것이다. 그래 알겠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찾는 답은 아니었다. 난 단지 왜 사람마다 윤리적 도덕적 역치가 다른지, 어떻게 하면 역치는 올리 수 있는지, 역치를 올리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메멘토의 주인공인 레드너가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단서에 매달려 내가 왜 지금의 자리에 있는지, 나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 내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

영화 메멘토는 아내가 살해당한 후 10분만 기억할 수 있는 남자의 복수극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공인 레드너가 찾던 세미라는 남자는 결국 가상의 인물이었고 진짜 아내를 살해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현실에는 그를 이용한 부패한 경찰과 마약상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레드너는


눈을 감고 있어도 세상은 존재한다는 걸 믿어야 한다.
(눈을 감았다 뜬 후) 존재하는군.      


세상은 우리가 눈을 감아도 존재한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코스모스(우주적 관점)의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세상은 동일한 속도로 흘러간다. 우주에 적용되는 물리적 법칙엔 예외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같은 경험을 하고서도 다르게 해석한다. 우리의 삶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레드너처럼 평생을 존재하지도 않는 살인마를 찾으며 허비할 수 도 있다는 것. 삶이란 결국 스스로 의미를 찾아 부여하고 선택적으로 해석한 기억의 연속이라는 사실.




나 역시 레드너와 같이 잘못된 답을 찾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문제는 누가 옳고 그른가, 어디까지가 수용 가능한 범위 인가처럼 밖에 존재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하는 것에 대한 나의 뱡향에 대한 명확한 답, 나의 기준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 도덕적 가치, 정의의 개념은 삶의 전반을 걸쳐 형성된 것이다. 시중에 넘쳐나는 방법론들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표면적 행동은 바꿀 수 있어도 내적 모순에 대한 갈등까지 사라질 수 없다. 결국 나의 문제는 내가 틀렸으면 어쩌지, 이렇게 행동하면 나면 손해 보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들로 내 삶이 잠식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전업주부가 된 삶을 실패로 규정했던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막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언제쯤 되면 단단해질 수 있을까. 웬만한 일을 그들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 안다. 무감각해져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보다 두렵고 흔들리지만 의연하게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사실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생은 번뇌와 권태의 반복이라고 했던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이 반복의 고통 속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각자의 삶에서 의미 있는 고통을 찾을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각자의 욕망에 대한 고찰이었음을. 결국 문제는 나였다.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생의 의지를 깨닫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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