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enna Vark Oct 20. 2021

나도 나의 꿈이 공무원이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꿈은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꿈과 책과 힘과 벽


마흔 넘은 주부인 내게 음악이 필요한 이유는 2가지다. 첫 번째는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노동요가 필요해서이고 두 번째는 과거에 좋아했던 음악이 문득 생각이 나서다. 생활을 거의 집에서 하는 나로선 데이터의 압박도 없고 제법 쓸만한 큐레이션 덕분에 유튜브를 이용하는데 알고리즘은 무서울 정도로 나의 취향을 잘 파악해서 추천을 해준다.

아들 등원 후 시작되는 월요 대청소 전 우리집 거실
청소 후 정돈된 거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무런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란 노래가 추천에 뜬 것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힘이었을까? 내가 찾아본 자기 계발 동영상의 힘이었을까? 무서운 유튜브의 알고리즘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실수로 튼 노래였지만 첫 소절인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던 나의 작은 방'이라는 가사가 시작하는 순간, 나는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노래가 절반 정도 지날 무렵 나의 눈에선 뜨거운 액체가 왈칵 흘러나왔다. 나는 내가 마흔쯤 되면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 되어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누구보다 알파걸로 자라온 나였기에 나의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파걸(Alpha Girl)은 학업, 운동, 리더십 모든 면에 있어서 남성을 능가하는 높은 성취욕과 자신감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용어이다.) 잘 봉합되었다고 믿었던 나의 심연에 다시 균열이 일어났다.




생활비 170만 원의 무게


나에겐 포기할 수 없는 적금이 2개가 있다. 하나는 주택청약통장이고 하나는 3년에 천만 원짜리 적금 통장이다. 청약통장에는 10만 원씩, 적금통장에는 27만 원씩 들어간다. 남편의 유일한 취미생활인 수영강습 등 커뮤니티 사용료가 포함된 관리비가 30~40만 원, 나의 개인 보험 8만 원(실비/암), 핸드폰 3만 5천 원, 아들 태권도 14만 원으로 고정비가 100만 원이 조금 넘는다.


유치원생인 아들에게 월평균 20만 원의 소비지출(도서, 의류, 장난감)이 발생하고 매주 주말마다 나가는 가족 나들이로 한 달에 10만 원 정도 소비한다. 외식이나 배달음식은 일주일에 1번 정도로 한 달에 10만 원쯤 된다. 물론 밖에선 남편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계부를 정리해보면 20만 원 정도는 가족의 화목한 시간을 위해 쓰인다.


개인적으론 책에 밑줄을 긋고 마음에 들면 반복해서 읽는 편이라 독서 구입비로 5만 원, 패션에 민감해 계절이 바뀌는 분기에 맞춰 미리 10만 원에서 20만 원 선에서 계절을 준비한다. 월에 5만 원 정도로 계산하면 나의 개인적 지출은 한 달 평균 10만 원인 셈이다. 기본적인 장보기를 포함한 매달 70만 원의 가처분소득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든다.


다행히 작년 아르바이트로 만든 500만 원의 여윳돈이 있어 1년 정도 마이너스가 발생해도 무사히 생활할 수 있었지만 지난달엔 남편으로부터 긴급 수혈을 받았다. 행사가 많았던 이번 9월도 정산을 해보니 40만 원이 부족하다. 남편은 웃으며 자기도 마이너스라며 이렇게 마이너스라면 차라리 27만 원짜리 적금을 넣지 않는 게 낫지 않냐고 놀리듯 말하지만 나에겐 목표가 있어 그럴 수도 없다.


현재 아들은 국공립 유치원에 다니고 있기에 원비가 들지 않는다. 나는 3년간 원비인 천만 원을 모아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영국한달살기와 유럽여행을 할 생각이다. 내가 26살에 보았던 넓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일찍 경험하게 해주고 싶기에 힘들어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27만 원은 유치원비로 쓸 돈이다. 원래부터 없는 돈인 것이다.


하지만 구멍 난 카드값은 나를 죄책감 들게 한다. 대한민국의 평균 근로자들의 월소득을 생각해보면 100만 원의 아파트 대출금과 생활비 170만 원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월급에서 270만 원을 제외하고 낡은 중고차도 유지하고 본인 핸드폰비, 보험비도 내야 한다.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은 맞벌이를 하지 않는 나에게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이 부산하다.




21세기 유한계급과 토템


마흔의 삶에선 더 이상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꿈꾸기보다 어떤 아파트에 살고 어떤 차를 타는지가 중요한 삶의 방향이 된다. 여전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나의 전업이 정당성을 잃지 않도록 집안일을 전담하고 사교육 없이 아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준비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낭비 없이 독서, 운동, 영어공부로 채웠다. 출산 후에도 흐트러짐 없이 몸매를 유지하며 심리학과 편입을 위해 10년 만에 다시 토익 960점을 받은 나에게 지인들 모두가 자기 관리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살림을 야무지게 하고 자기 계발을 잘한다고 해서 안정적인 가정유지를 위한 맞벌이의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달에 50점씩 2달동안 100을 올렸다.



올초 1월에 2022년 학사편입을 목표로 토익을 본 후 가난한 나는 다시 마음이 소란해져 취업으로 선회하고 이력서를 넣었지만 소식이 없었다. 온라인 쇼핑몰 관련 일자리와 영어학원강사 자리였는데 나의 뇌피셜로 보자면 전자는 나이 때문에 후자는 무경험자라 경쟁에서 밀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내일 배움카드로 토포샵과 일러스트를 배우며 2021년 상반기를 보냈다. 수업이 끝나고도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니 토익이나 완성하자 맘먹고 7,8월 두 달 동안 집중해서 플랜 B를 완성했다.



신랑은 결혼 전 나에게 말했다. 본인은 서울로 이직이 불가능하니 내가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내려와서 무슨 일을 하든, 일을 하지 않든 내려오기만 하라고. 그리고 출산 후 육아를 하는 나에게 우리 상황에서 생활비는 170만 원이 최선이라고. 만약 내가 그것에 맞춰 살 수 있으면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금의 아파트를 팔고 대출이  없는 저렴한 곳으로 가면 된다고. 여전히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남편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가 없다. 2013년 6800만 원 오래된 아파트 전세로 시작해 1억 종잣돈으로 2015년에 분양받은 이 아파트가 현재 우리 가족에겐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난 가끔 내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패션이 아니라 성적에 맞춰 선생님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에서 연봉과 명함의 힘으로 무엇이든 극복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현실에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며 나의 인정 욕구와 열등감으로 뒤범벅이 된 욕망을 모르는 척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물려받은 뒷배경도 없는 내가 120년 전에 쓰인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속 해석이 여전히 유효한  21세기에서, 돈이 성공, 가치 있음, 권력으로 치환되는 이 시대에서 나를 지켜줄 토템인 사회가 인정하는 직업이나 자본도 없이 바로 설 수 있을까. 사실 여전히 두렵다.


 

내가 단 댓글에 달린 댓글 나도 나의 꿈이 공무원이면 좋겠다.


작년 한 해 유행했던 MBTI 성격 유형 분석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TJ형에게 유리한 자본의 시대에서 INFP형인 내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사람인지, 왜 그동안의 노력들이 눈에 보이는 성과로 환원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나의 강점들이 가치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처럼 인간은 해보지 않은 것들에 후회하지, 해 본 것엔 후회가 없다고. 그리고 인생에서 우리 각자가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할 때라는 것. 마지막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그럼에도 1인분의 삶의 기본은 책임져야 하는데 육아하며 마흔이 넘은 지금, 사실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새롭게 룰이 바뀌고 있는 지금, 여전히 나는 방황 중이다.


나의 꿈은 슈뢰딩거의 반쯤 죽은 고양이 같다. 내가 가진 한정된 자원을 이용해 모든 가능성을 구현해 보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믿기란 여간 어러운 일이 아니니 피아제가 설명한 대상 연속성의 개념처럼 나는 지금 눈앞에 실체가 없지만 존재하는 나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우주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유기체이니 나는 믿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의 고양이는 살아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너져봐야 알 수 있는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