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청춘에 적당함은 없기를.
번아웃과 월급루팡, 그 사이에서
성실함의 가치가 지금처럼 빛바랜 시절이 있을까요.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두배가 되고 지인이 코인과 주식으로 하룻밤에 수억 원을 버는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직업윤리와 성실함의 효용가치를 논의할 수 있을까요. 탈세가 절세로 둔갑하고 성공을 위해서 타인을 도구화하는 시대. 무엇이 옳고 그른가 보다 무엇이 내게 득이 되는가가 중요한 시대. 소시오패스와 나르시시스트가 전 국민 모두 아는 단어가 되는 시대 흐름 속에서 높은 도덕성과 성실함은 어떻게 보면 호구 잡히기 딱 좋은 성격적 특성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며 10인 정도의 규모의 회사에서 적용될만한 이야기입니다.
말을 하지 않을 뿐 회사와 동료는 알고 있다.
당신이 월급루팡이라는 사실을.
올 해를 시작하며 무엇이 되었든 일을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 저는 알바몬, 알바천국, 사람인, 잡코리아 등을 가리지 않고 시간과 거리가 허락하는 일자리엔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생각보다 마흔의 나이 장벽은 높았고 기대와 실망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중 드디어 한 곳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패션업계에서도 일이 힘들기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이것저것 잴 수 있는 20대가 아닌 저에겐 그것이 무엇이 되든 시작을 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때문에 잡플래닛에 발견한 무시무시한 기업 리뷰를 뒤로 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처음 한 달 동안 몸이 꽤나 힘들었어요. 10년 만에 돌아간 매장에서 다시 8시간을 서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다리가 꽤나 묵직했답니다. 20살은 어린 사수로부터 다시 일을 배워야 했고 아침에 출근을 하는 날엔 2시간 30분 동안 화장실부터 큰 SPA 브랜드의 매장을 혼자 청소해야 했으며 집게를 들고나가 매장 주변 쓰레기를 주워야 했어요. 또한 대부분 고객님들은 저의 친절함에 친절함으로 응답해주셨지만 가끔은 말 한마디로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람 기운을 뺄 수 있을까 놀라울 만큼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고객님도 마주해야 했답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일을 배워나갔답니다. 그것이 42살 경단녀인 저에게 기회를 준 회사에 대한 보답이며 적어도 1/N의 몫은 하고 싶었거든요.
실력과 관계없이 초심자에게 도움이 되는 자세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친절함이고 다른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저 또한 관계에 대해 민감성이 높은 사람이지만 짧은 시간 스치듯 나누는 몇 마디의 대화는 생각보다 제 삶을 따듯하게 만들었고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일하는 동안 체력은 방전이 되었지만 하루 동안 저를 스쳐간 수많은 고객들과 동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것은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채운 자에게 허락된 충만함일 수도 있고 스스로가 행한 작은 선의에 대한 보답으로 돌려받은 자기효능감일 수도 있습니다.
이미 그들의 자리를 경험했기에 점장과 스텝 사이에서 고생하는 사수에게 도움이 되려 했어요. 그들이 그들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매장의 기본이 되는 베이직한 업무를 책임감 있게 해 나갔어요. 또한 나이와 함께 사라진 기억력을 만회하기 위해 그날에 배운 것과 실수한 것을 메모하며 하루를 마감했답니다. 교대하는 동료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저의 쉬는 시간 몇 분을 양보했으며 보이지는 않지만 매장 유지에 중요한 일엔 진심을 다했답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받는 돈이 똑같은데
꼭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나요?
얼핏 보면 적은 일을 하고 같은 돈을 받는 동료가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상벌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조직에선 일이 하는 사람에게 집중되는 반면 성과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기도 하지요. 억울할만합니다. 회사 내에서 이런 문제가 동일하게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특성이라고 하기보단 직장 내 풍토라 볼 수 있어요.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멀리 본다면 개인의 평판과 동료와의 신뢰관계는 회사 내에서 초기에 구축해야 할 중요한 자산입니다. 또한 업무를 통해 축적된 실무 경험은 궁극적으로 직업인으로서 우리가 획득해야 할 유능함의 기본재료가 됩니다.
문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관료적인 큰 기업에서는 다를 수도 있지만, 10명 남짓 한 팀으로 일을 하다 보면 누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알 수밖에 없어요. 자료를 하나 정리해도 다음 사람을 배려해서 보내는 사람이 있고 아무렇게 대충 정리해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을 크든 작든 꼭 타인에게 미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팀을 염두에 두고 전체를 보며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어도 업무시간 20분 전에 도착해서 미리 하루를 워밍업 하는 사람이 있고 아슬아슬하게 도착해 바로 화장실로 직행 후 30분 후에 사무실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벌써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어요. 누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죠.
회사는 유능함 혹은 성실함 둘 중 하나는 장착을 하고 있어야 공생이 가능한 생태계랍니다. 또한 동료들과 긍정적인 유대감을 맺고 좋은 평판을 유지함은 개인의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월급루팡의 마인드로 나의 일을 타인에게 미루고 함께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이 단기적으로는 이득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역량 부족으로 조만간 파산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죠.
3개월 만에 점장 대행자로
비즈니스가 공격적으로 성장을 하는 시기가 지난 시점에서 사실 정해진 것은 없어요. 대행자가 된다고 해서 월급인상이나 승진이 약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과정을 넘은 것일 뿐이지요. 하지만 정해진 것은 하나 있답니다. 그것은 같은 임금에 앞으로 더 많은 업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가 3개월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으며 수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운이 없다면 도중에 포기하고 고생만 할 수도 있지요.
가장 적게 후회하는 삶
생물학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생존 방식이 있어요. 또한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다르지요. 레몬 마켓처럼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가 정한 가치를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본인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은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어쩌면 인생은 각자의 기준을 찾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호구처럼 보일지라도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고도 아깝지 않을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위너가 아닐까요.
저는 주어진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우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가장 적게 후회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자신만의 의미와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기꺼이 호구가 되어보세요. 운명의 여신에겐 이것저것 재는 사람보단 호구인 당신이 더 매력적 일지 모르니까요.
호구가 되거나 위너가 되거나
당신의 청춘에 적당함은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