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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비 Sep 28. 2021

베트남어에 투자하다

호모 비아토르의 베트남 방황기 #1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2018년, 처음 베트남으로 넘어왔던 해. 하노이범대학교에서 K-MOVE 연수를 받던 시기. 수중엔 300만 원도 채 안 되는 돈만 있었고, 비록 한 달 25만 원 안팎으로 생활했어도 부족함 없이 행복했다. 회사라는 울타리에 갇혀 수동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내 통제 범위 안에 들어와 온전히 나에 의해 채워져 가는 것 같아 좋았다. 한편으로는 스스로 채워가는 이 시간이 조금이라도 헛된 시간으로 채워질까 두려웠고, 그 덕분에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규칙적이고 가장 열정적이었다. 당시 나의 하루는 이랬다.


- 평일 -

 6:30~7:30  요가 수업을 듣는다. 헬스장에서 하는 요가 프로그램인데, 강사는 대부분이 인도분이었다. 요가, 스피닝 등 각종 GX프로그램까지 다 포함된 이 고급 헬스장의 금액은 월 100만 동(한화 약 5만 원). 이 가격에 인도 강사의 요가 직강이 가능하다니! 당시 내 일기장 이렇게 적혀있다. '가진 것에 비해 동남아에서는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7:30~8:30  헬스장에서 씻고 나와 5 천동(한화 약 250원) 짜리 베트남식 주먹밥(Xôi)을 사서 바로 학교로 향다. 밀가루를 잘 안 먹던 나는 이 주먹밥이 너무 좋았다. 주먹밥을 먹고 있으면 동기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8:30~11:30  베트남어 수업 시간. 10명씩 2반으로 나누어져 진행되던 수업엔 총 4명의 현지 선생님이 있었다. 꼬늄, 꼬하, 꼬옌, 꼬홈. 내가 베트남어에 푹 빠져 살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11:30~13:00  점심시간이다. 학교 부근에서 베트남식으로 끼니를 해결한다. 원하는 메뉴로 골라 담아 먹는 현지식 백반이나 분짜, 쌀국수 같은 걸 주로 먹었는데, 가격은 2~3만 동(한화 약 1,000~1500원) 정도로 저렴했다.

 13:00~16:00  다시 베트남어 수업이다.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그렇게 하루에 총 6시간의 수업이 진행된다.

 16:00~17:00  현지 대학생과 함께하는 프리토킹 시간. 원하는 사람만 신청해서 각자 경비를 지불했던 일종의 과외이다. 나는 동기 1명과 같이 2:1로 프리토킹 수업을 신청했는데, 5만 동/1시간/1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아마도...?)

 17:00~22:00  학교 근처에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카페로 가서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다. 하루 6시간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복습할 내용이 상당했다. 내가 주로 가던 카페는 하노이 사범대 건너편에 있는 'The Coffee House'인데, 거의 매일 출석 체크하듯 가다 보니 직원 친구들이 먼저 말을 걸던 단골손님이 되었다. 사실 말이 단골손님이지 지금 돌이켜보면 음료 한 잔 시키고 몇 시간씩 앉아있던 진상 손님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래도 커피 한잔에 5~6만 동씩 했으니 당시의 나에겐 이 카페가 밥보다 더 큰 지출이었다고!

 22:00~  기숙사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고, 룸메 언니와 수다를 떨다가 곯아떨어지곤 했다.


- 주말 -

오전 >> 헬스장에서 운동을 다. (물론, 잠을 택할 때도 있고, 이런저런 핑계로 안 간 날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오후 >> 카페에서 베트남어 공부를 하며 하루를 보낸다. (물론, 동기들과 콧바람 쐬러 서호나 호안끼엠에 놀러 갈 때도 있긴 다.)


연수 당시 책과 공책 (B권 들어가자 마자 취업을 한 탓에 B,C권을 못 끝내고 온 게 내심 아쉽기도 하다)

베트남어 수업이 6시간, 현지인과의 프리토킹이 1시간. 그리고 혼자 복습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대략 4~5시간. 그렇다. 하루 대부분 시간을 차지하던 것은 베트남어였다. 근데 그게 힘들고 고통스럽기보다 재미있고 좋았다.(지난 일이라 미화된 기억일지는 모르겠다만...) 현지에서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날 배운 것을 그날 바로 써먹어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다. 오늘 "Cái này bao nhiêu tiền ạ?(이거 얼마예요?)"와 "giảm giá được không ạ?(깎아줄 수 있어요?")를 배웠으면 그날 물건을 살 때 써먹으며 현지분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또 앞서 말했현지 선생님들이 너무 좋았다. 매일 밤 그들과의 수업이 기다려질 정도로였으니 말이다.


내 길의 방향성을 정하지 못했던 연수 당시, 난 그저 베트남어가 재미있어서 내 시간을 베트남어에 투자했다. 교육과정 10년 동안 영어를 공부했어도 여전히 영어가 안되는데, 고작 연수기간 몇 달을 제 아무리 베트남어에 올인하다고 해서 업무에 써먹을 만큼 잘할 수 있을까? 잘할 거라 장담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설사 베트남어를 잘한다 하더라도 신방과 출신에 광고밥 먹던 내가 여기서 어떤 직무/어떤 회사로 갈지조차 감이 안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어에 투자한 것은 그냥 그때의 나는 취업이라는 목적보다 베트남어가 좋아서, 지금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게 그거라서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또한 어디로 갈지 몰라 일단 나는 법을 배웠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 줄지는 미래로 직접 가보지 않는 한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뭐가 됐든 어디론가 데려다 줄거라 믿으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는 그냥 이 순간 좋은 것에,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 베트남 취업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베트남어보다 영어를 할 때 베트남 취업이 더 용이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베트남어를 필요로 하는 직무도 있지만, 대체로 영어가 기본이고 베트남어는 +α인 직무 채용이 더 흔하다. 기술직을 제외하면 해외영업이나 물류 직무의 채용이 많다 보니 영어를 보는 곳이 더 많을 수밖에. 그러나 영어 못해도 밥벌이하고 살고 있는 나도 있지 않은가? 세상에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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