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에듀케이터의 업세이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세상에 절대가치가 하나 있어요.
바로 시간이에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거든요.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리학자 김상욱이 위의 말을 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이후 이 문장이 꽤 오래 맴돌았다. 우리는 평소에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라고 표현한다. 서점 매대와 유튜브에서 시간 관리 잘하는 법, 부자들의 시간 관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등 시간과 관련된 콘텐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때론 시간을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 현명하게 사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는 특징 때문에 그런 걸까?
이쯤 되니 '그럼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시간을 효율성, 생산성, 경제성이라는 가치와 기준으로 바라보면 나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시간에 대한 기준을 잠시 내려두고 생각해 본다.
깊이 알기 위해 필요한 시간
미술관 에듀케이터는 예술 작품과 사람을 연결 지어 교육 프로그램을 만든다. 첫 번째로 예술 작품을, 두 번째로는 사람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깊이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쓰고, 들여야 한다. 미술관 에듀케이터의 일을 ‘예술 작품을 여러 번 보기’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한 작품을 앞, 옆, 위, 아래 등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전시실에서 독대하기도 하고, 작품 앞에서 관람객의 행동과 함께 살펴보기도 하고, 화소 높은 사진으로 작품의 부분을 확대하고, 여러 전문가가 작성해 놓은 글을 통해 생각해 보기도 하고, 작품과 다양한 연령층과 연결해서 바라보기도 한다.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다양하게 바라보는 시간들이 켜켜이 축적된다. 그리고 맨 처음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와 다르게 남는다.
미술관은 어려워요. 낯설어요.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니깐 이해가 훨씬 잘 되어서 좋았어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후, 관람객들이 자주 주는 의견이다. 사람들에게 미술관은 왜 문턱이 높고 발걸음 하기 어려운 곳일까? 일 년에 거쳐 미술관에서 전시는 적어도 3-4회가 교체되고 그때마다 새로운 작품들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처음 전시가 오픈되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나 또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낯설다. 그 낯섦을 넘어 심지어 난해한 작품들이 투성이다.
반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모네의 <수련> 시리즈라 하면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어릴 적 미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미술’이라고 했을 때 물감과 캔버스라는 익숙한 재료로 그려졌다. 하지만 고흐, 고갱, 마네, 모네도 그들이 활동했던 때에는 대중들은 낯설어하고 심지어 미술 평단에서 외면, 비난, 거부를 당했었다.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그 당시 그들의 그림은 이전과 달랐고 급진적이었다.
위에서 말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다르게 현대 작가들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각과 개념을 표현하는 방식과 재료가 더 다양해지고 있다. 조금 다른 것은 호기심을 줄 때도 있지만, 현대 미술에서는 그 낯섦은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그 거리감을 좁히기 위한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그 작품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어느 한 연구에서는 우리가 한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평균 17초라고 한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가 수년간 혹은 몇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들었던 생각이 축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17초에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처음 바라본 낯선 작품과 나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건 그 작품을 바라보는 시간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앞에서 시간 보내기
내가 다니는 미술관은 전시 교체 중이다. 이번 주에 나는 교사들을 위한 전시 감상 지도서를 준비하기 위해 전시실로 내려가 틈틈이 작품을 봤다. 역시나 낯설고 어렵다. 맨 처음에는 전시실을 한 바퀴 쭉 돌아보았고, 설치 방식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앞에 서서 가만히 감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품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나의 생각이 그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학 공식처럼 정답을 맞추는 것이 작품을 감상하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기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영화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숨은 의미를 발견하여 더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왕 당신이 미술관에 발걸음을 디뎠다면, 평소에 자신이 보내는 시간의 속도보다 느리게 보내보면 어떨까? 그리고 가급적 맨 처음에는 어떠한 정보 없이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인지해 보면 좋겠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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