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스타트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아 Apr 05. 2020

소리없이 강한 택배박스, 날개박스

“택배 생활 12년···테이프 없는 날개박스로 친환경 배송 꿈꾸죠”

“택배 포장하는 분들은 하루 종일 테이프와 박스를 갖고 씨름하세요. 일 자체도 힘들지만 테이프에서 시너·벤젠 등 유해물질이 나오거든요. 테이프 냄새를 맡아 어지럼증이나 메스꺼움 등을 호소하기도 하죠. 테이프가 만드는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이명에 시달리는 분도 계세요.”


황금찬(46)·황규찬(42) 형제는 작년 말 테이프가 필요 없는 ‘날개박스’를 만들었다. 회사 설립 전, 날개박스 황금찬 이사는 12년 동안 택배기사 일을 했다. 하루에 최대 400개 물량을 나르던 베테랑 택배기사였다. 택배를 건네주는 협력 업체 사무실에는 테이프 소리가 항상 들려왔다. 포장하는 직원들이 커터칼을 잘못 써서 손가락을 밴드로 감고 있는 모습도 종종 보였다. 우체국 공무원의 애로사항 1위는 ‘택배 박스에 붙이는 테이프의 소음’이라는 설문결과도 있었다. 

황금찬·황규찬 형제.

‘테이프 없이 상자를 붙일 수 없을까.’ 황 부장의 이전 직장은 플라스틱 제품을 찍어내는 제조판을 설계하는 금형 회사였다. 손재주가 좋아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동생 황규찬 대표도 비슷한 일을 했다. 그는 2016년부터 기계 설계 대행 회사를 1인기업 형태로 운영하고 있었다. 연 7000만~8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형이 테이프 없는 상자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해 하던 일을 접고 창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상자와 상자가 접하는 부분에 양면테이프를 붙였어요. 접착력이 약해 잘 떨어지더군요. 상자 면이 서로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옆부분을 덮어 고정시키는 ‘날개’가 있어야 했습니다. 날개박스 시제품을 만들기까지 3년 정도 시간이 걸렸어요. 시행착오가 많아 목형(주물형상을 만들기 위해 제작하는 나무 형상 틀)을 파서 버린 것만 해도 70~80개 정도 됩니다.”


기존 택배박스는 판지를 조립해 테이프를 붙인다. 날개박스는 골판지 내·외부에 친환경 핫멜트라는 접착제를 발라놔 별도의 테이프가 필요 없다. 핫멜트는 아이스크림콘을 싸는 종이를 붙이는데 쓰이는 접착제다. 음식 표면에 닿아도 괜찮을 정도로 인체에 무해하다. 날개박스는 커터칼·가위 없이 종이접기 하듯 손으로 조립한다. 박스를 열 때도 힘들이지 않고 개봉할 수 있다. 기존 택배박스는 테이프를 떼 폐지함에 분리배출해야 하는데 테이프 때문에 쓰레기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테이프 없는 날개박스는 전체가 재활용품이라 그대로 분리수거할 수 있다.

날개박스와 기존 택배박스가 충격을 받았을 때 손실되는 정도를 비교해봤다.

“외부 충격에 잘 떼어지는 것 아니냐고 많이 물어보시는데 날개박스는 부딪힐수록 상자면끼리 더욱 잘 붙습니다. 작년 홍삼업체에 박스를 발주받아 4개월간 약 600개의 물량을 발송했습니다. 그중 박스나 내용물이 훼손된 사례는 한 번도 없었어요. 홍삼제품은 무게도 많이 나가고 값이 비싸 다루기 까다로워요. 박스 완성도를 인정받아 이후에도 업무협약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날개박스를 택배회사로 반송할 때 기존박스보다 더 상태가 깨끗합니다. 테이프를 붙였다 뗐다 할 필요 없이 고객이 받았던 그대로 내용물을 담아 날개박스를 접어 반송하면 되거든요.”


2018년 1월 테이프 없는 상자 제조 기업 ‘날개박스’를 창업했다. 두 형제가 가진 자본금은 3000만원이 전부였다. 박스를 제조하는 설비를 갖추려면 최소 5억원이 필요했다. 황 대표는 종이상자를 전문으로 제조하는 업체들을 전부 찾아갔다. 제조업체 사장들은 “박스 단가가 비싸 수익성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날개박스에 들어가는 친환경 핫멜트 접착제 때문에 상자 단가가 높아졌다. 또 골판지 원단부터 직접 박스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날개박스를 하나 만드려면 골판지 제조업체·박스커팅업체(박스를 크기에 맞춰 잘라주는 업체) 등 여러 회사를 거쳐야 한다. 일반 박스 제조회사들이 내놓는 상자(363원)보다 단가가 1.5배 정도 비쌀 수밖에 없다.

날개박스 설계 원리.

“자동 접착기기 제조업체 에이스기계 대표님이 은인이세요. 에이스기계는 종이박스 설계·제조 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요. 유럽·미국 등으로 수출도 활발히 하는 국내 주요 박스 설계기기 제조업체죠. 큰 회사를 이끄는 이철 대표님과 처음 만난 지 일주일 후 ‘고민을 해봤는데 앞으로 필요한 친환경 사업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죠.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지 못하면 지구 환경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는 말을 하면서 나중에 기계비를 갚아도 된다고 해주셨습니다.”


황금찬·황규찬 대표는 에이스기계 이철 대표의 도움을 받아 5억원 상당의 날개박스 제조기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일반 판지를 이 기기에 넣으면 날개박스 설계대로 접어준다. 또 상자 겉면에 핫멜트 접착제를 붙여준다. 길이가 20m에 달하는 이 기기는 시간당 1만개의 날개박스를 제작할 수 있다. 모터 컨트롤러·트레일러 등 2만여개의 부품이 들어갔다. 만들 수 있는 박스 크기는 10종류다. 에이스기계 이철 대표는 두 형제가 5억원을 할부로 갚을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고 한다.


“지금 공장과 사무실로 쓰고 있는 시흥시 시화벤처 업무공간도 에이스기계에서 내준 공간입니다. 박스 설비기계만 2000평(약 6611㎡) 정도를 차지해요. 설비를 들일 곳이 없어 고민하던 중 에이스기계 대표님께서 공장 한켠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은행 대출을 받자마자 에이스기계에 진 빚부터 갚았어요. 모자란 돈은 기술 보증과 중소기업 진흥공단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날개박스가 충격에 강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농구골대에 던져보기까지 했다

기계가 완성되기까지 약 1년 반까지의 시간이 걸렸다. 작년 초에 지원한 혁신형 에코디자인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날개박스가 디자인이 간편한데다 제품 자체가 친환경이라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수상 상금은 2000만원이었다. 2018년 12월 설비를 완성한 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수상상금을 포함한 2018년 첫해 매출은 6000만원이다. 지금까지 매출은 크지 않다. 택배업체들은 날개박스를 보고 기다렸던 제품이 마침내 나왔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날개박스의 원가를 듣고 발주예약을 망설였다. 앞으로는 설비를 늘려 날개박스 원가를 기존 택배보다 1.2배 수준으로 떨어뜨릴 예정이다.


“날개박스는 조금씩 반응을 얻고 있어요. 단가가 비싸다 보니 소규모 쇼핑몰보다 투자 자금이 충분한 대형 배송업체들 위주로 제안을 넣고 있습니다. 올해 3월 현대홈쇼핑과 3만장의 발주협약을 맺었습니다. 마침 현대홈쇼핑에서 테이프 없는 박스를 찾고 있었다고 해요. 물류 관계자 말을 들어보니 패션 등 의류 용품을 기존 테이프 박스로 배송하면 의류 손상 때문에 항의를 자주 받는다고 합니다. 커터칼로 박스 테이프를 제거하면 안에 들어있는 옷까지 훼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날개박스는 상자를 맨손으로 열 수 있으니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고객 반응이 긍정적이자 현대홈쇼핑은 앞으로 패션 상품 외에도 다른 제품을 배송할 때도 날개박스를 사용하기로 했다. 또 배달의민족·록시땅 등에서도 날개박스를 사용하고 있다. 황대표는 에이스기계와 힘을 합쳐 친환경 제품에 관심이 많은 미국·유럽 등에 진출할 계획이다. 올해 매출은 5억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날개박스를 사용할 날을 꿈꾸고 있어요. 환경과 인간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비닐 테이프를 줄이는 날개박스를 만들어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작게나마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저희 뜻과 함께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글 김지아


매거진의 이전글 뉴욕에 ‘태극기 꽂은’ 30대 한국인, 전세계 주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