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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야채 Mar 28. 2024

영화 <괴물> 리뷰

괴물은 나였을거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을 봤습니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여운이 깊어 몇번을 다시 관람했습니다.


후기를 쓰지 않을 수 없어 긴 글을 남깁니다.


※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이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 :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모두 다 다르게 흐른다.

자신의 해석과 관점에 매몰되는 사람들은 폭력과 상처를 준다.


1. 구성

영화는 1부와 2부, 3부로 나뉜다. 1부는 엄마 사오리의 관점, 2부는 호리 선생님의 관점, 3부는 아이들의 관점이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비밀이 드러난다. 숨겨진 비밀이란 각 등장인물들의 ‘사각지대’다.


편견과 확신에 갇힌 인물은 얼마나 많은 사각지대를 갖고 있는지, 보지 못한 (또는 않으려 했던) 각도에서 얼마나 많은 진실을 놓치는지 서로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을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같은 사건도 입장과 시선의 차이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 그 관점의 차이를 표현한다. 그렇게 생기는 오해가 얼마나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내는지 또한 섬세하게 보여진다. 아무도 “아프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 점점 상처와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멀어진다.  


2. 캐릭터 분석

(1) 사오리  

사오리는 현실적이다.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아들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빠는 환생해서 노린재가 됐을까?” 라는 아들의 질문에 “더 근사한 존재가 됐을걸” 이라 답한다. 그러자 아들은 곧바로 “기린?”이라 묻는다.



사오리는 “말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빠가 말을 좋아했거든. 우릴 태워줄 수 있고” 라고 답한다. 사오리에게 말이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다. 그밖에 ‘말’의 다른 요소를 고려해보기란 사치다. 예를 들어 마종마다 갈기의 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들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무리에는 엄격한 서열이 존재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등의 정보는 불필요한 존재다. 싱글맘으로 세탁소를 다니며 혼자 아들을 건사하기 바쁜 사오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기능과 실용의 측면에서 계산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들은 다르다. 아들은 아빠가 더 근사한 존재로 태어났을거라는 말에 왜 바로 ‘기린’을 떠올렸을까?

극본가가 의도한건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의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에서 기린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shortcuts/2019/oct/29/99-per-cent-giraffes-gay-loving-looks-misunderstood



2019년에 논쟁이 됐던 가디언지 기사다.


기자는 자연사 박물관의 생명과학 연구자인 나탈리 쿠퍼 박사의 말을 인용했다. 나탈리 박사는 “기린을 관찰한 결과 동성간 목을 껴안고 핥고, 코를 비비며 올라타는 등의 애정표현을 하곤 한다” 고 밝혔다. 또한 “그렇다 해서 기린이 ‘동성애를 한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못박는다. 기린이 ‘게이’라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관점에선, (기린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표현하겠다) 기린은 동성애를 하는 대표적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기린은 모계사회를 꾸리는 전형적인 포유동물이다. 암컷 기린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다 적절한 시기에 수컷과 교미한다. 교미가 끝나면 수컷 기린은 떠난다. 수컷들은 새끼를 기르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반면 암컷 기린들은 모여 살면서 다른 암컷의 새끼들까지 돌본다. 자신은 생식하지 않고 다른 새끼들만 돌보는 성체 암컷 기린들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미나토가 무의식 중에 말한 ‘기린’이란건 어쩌면 자식을 낳고 떠나버린 아빠, 그리고 자신을 홀로 돌보는 엄마, 그리고 같은 반 남자애에게 관심을 갖게 된 자신을 떠올리며 한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듯 영화의 모든 대사 하나 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오리는 미나토의 엄마다. 그래서 “(죽은 아빠에게) 네가 결혼해서 가족이 생길 때까지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가족이면 돼” 라는 말을 당연하게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사오리는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듣던 미나토,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리는 자동차에서 갑자기 뛰어내린다.


사오리는 다친 아들을 병원에 데려간다. 검사를 받고 돌아오는 길. 어느순간 이해할 수 없이 변해버린 아들에게 사오리는 토하듯 쏟아낸다.


“왜 그랬니?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먹는게 느리다고 놀려?

머리카락을 왜 갑자기 자르고, 운동화는 한짝을 잃어버리고, 귀는 왜 그랬어?”


미나토 역시 감정적으로 격해져 소리를 지른다.


“돼지 뇌야. 내 뇌는 돼지 뇌랑 뒤바뀐 거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이미 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오리. 다시 묻는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릴 해?” 대답이 돌아온다. “호리 선생.”


다음날 사오리는 학교로 찾아간다.


사오리는 학교로 여러번 찾아가는데, 그때마다 주차를 후진해 넣는 장면을 영화는 꽤나 공들여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때문에 차를 삐끗하기도 한다.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 학교를 향한’ 사오리 역시, 사실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지 못해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의미다.

사오리가 학교로 향하면,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얼마 전 자동차 사고로 손녀를 잃었다는 교장이다. 교장의 손녀가 죽은 이유는 교장의 남편이 자동차로 후진을 하다 뒤에서 놀고 있던 손녀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이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는 사오리가 학교로 갈 때마다, 반복해서 후진주차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선생님이 아들에게 폭언을 했다고 따지러 가는 사오리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 때문에 여린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폭력과 잔인성을 휘두른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사오리는 교장을 만난다. 교장은 중이 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수행을 하듯, 매번 바닥에 붙은 껌딱지와 때들을 스크래퍼로 긁어내고 있다. 교장의 이 행위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스스로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괴롭고 슬픈 현실 (남편의 사고로 인한 손녀의 죽음)을 잊기 위해, 뭐라도 붙들어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인간의 덧없는 노력 같은 것이 읽혔다. 영화는 이런 작은 디테일 요소 하나 하나가 모두 공들여 만들어 울림을 준다.


사오리는 교장을 붙들고 계속해서 따져 묻는다. 결국 호리 선생을 앞에 불러다놓고 사과를 받아내지만,

어딘가 불손한 그의 태도가 께름칙하다.  학부모 앞에서 사탕이나 까먹고, 표정도 불만 가득한 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여기까진 사오리의 시점이니 충분히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오리는 집에 돌아온다. 아들을 보는데 아들이 여전히 이상하다. 분이 안풀린다. 선생님이 무릎 꿇고 사과를 할 때까지 학교를 찾아갈 기세다. 다음날도 화가 잔뜩 나서 학교로 돌아가 교장과 선생님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다그친다. 교장과 선생님들은 그저 딱딱하게 굳은채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러자 호리 선생이 다가와 정말 죄송하다 사죄를 한다. 그의 사과가 충분치 않아 그만두라 말하는 사오리.

팔딱팔딱 뛰는 사오리를 보며 감정이 욱 치받는 호리 선생. “미나토는 호시카와 요리라는 아이를 괴롭힌다”는 폭탄 발언을 한다.


집에 돌아온 사오리는 미나토의 방에서 라이터를 발견한다.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했던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처음으로 아들을 의심한다. 그리고 영화는 장면을 전환해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을 비춘다.  


(2) 호리 선생

영화는 다음 챕터로 넘어가 호리 선생 시점을 보여준다. 사실 그는 평범한 캐릭터다. 아니, 평범보다는 살짝 불쌍하게 그려진다. 극중 인물들은 그의 약간 어둡고 우울한 인상에 편견을 갖는 듯한 설정이다.

(호리 선생의 시점에서) 호리 선생이 등장하자마자 내뱉는 첫 대사는 길거리에서 여자친구에게 “결혼하자”는 말이다. 영 무드가 없긴 하다. 센스 없고 지루한 인상을 풍기기도 하다. 그게 바로 영화 내내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캐릭터다. 자신의 주장과 신념이 확고해 다른 해석은 별로 끼어들지 않는 인물이다.


그 말을 들은 여자친구는 “그런 말은 야경 좋은 데서 하는 거 아냐?” 라 핀잔을 주며 가볍게 넘긴다. 호리 선생이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아이들, 때마침 불타는 건물을 찍고 있다가 ‘불타는 건물’과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호리 선생’을 연결시킨다. 감정이 격앙된 아이들은 “(불타고 있는 건물의) 걸스바에서 나온다”며 놀린다. 이게 바로 말도 안되는 거짓말, ‘호리 선생이 유흥업소에 다닌다’는 루머가 퍼지게 된 전말이다.

어딘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호리선생님의 운명은 여자친구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금붕어 불쌍해. 자기 같아.”

“나는 불쌍하지 않아. 얘는 뒤집어지는 병이야. 나 같다니 너무하네.”

“오타 찾아서 출판사에 편지 쓰는게 취미인 사람이?”


여자친구는 시종일관 자유분방하고 가벼운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호리 선생님이 고리타분하고 따분하게 여겼을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있어 호리 선생은 진지한 관계가 아니라 그냥 같이 노는 정도의 남자라고 느껴진다.


“즐겁게 웃는 니 모습 섬뜩해. 학생들도 두렵게 느낄걸.”


…그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할 말인가. 이렇게 막말을 서슴지 않는 연인에게서, 호리 선생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저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직진한다. 어쩌면 호리 선생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매사 진지하게 생각하길 좋아하는 그가, 그녀의 폭언을 이렇게 가볍게 넘기다니. 상처받지 않다니. 호리 선생이 그녀와 사귀는 이유는 단순히 ‘결혼’하고 남들과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어떤 기능적인 목표 달성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호리 선생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자신의 직업에 대해 긍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 반응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여자친구는 그의 사명감을 비웃는다. 그녀는 그에게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 이름 기억나?”라고 물으며 “기억 안나니까 힘 좀 빼. 사탕이나 먹고”라 조언한다.


그래서 나중에 노발대발한 사오리가 호리 선생에게 따지러 갔던 순간, 뜬금없이 호리 선생이 사탕을 먹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조언해준 방법이 너무 진지해지지 말고 사탕먹기’라는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지켜보는 사오리에겐 전후 맥락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짓된 맥락이 있었다면 아이들이 퍼뜨린 거짓루머, ‘호리 선생은 걸스바에나 들낙거리는 불량한 사람’이라는 이미지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는 것.


사오리의 분노는 가중된다. 관객 역시 호리 선생이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사탕을 까먹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 좀 이상하다’는 의심의 색안경을 끼게 된다. 영화는 어쩌면 우리 모두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편견과 오해를 꼬집는다.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이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행동한다고, 그가 실제 저지른 행동보다 더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호리 선생은 외골수였을 뿐이다. 그런 인물들은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것과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게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자친구는 툭 내뱉는다. “(호리가) 싱글맘이라. (걔네 엄마가 유난인가봐)” 그러자 호리 선생은 반박한다. “우리 엄마도 싱글맘이야.” 여자친구 왈 “괜히 과잉보호하고 날카롭게 보는거 아냐?” 호리선생은 다시 대꾸한다 “‘날카롭게 본다’는 말을 ‘옳지 않게 본다’는 뜻으로 쓰면 안돼. 원래 뜻은 본질을 깊이 파고 들어서…”


사건을 깊게 보려는 호리 선생의 연설이 시작되자, 여자친구는 그의 입을 막아버리며 사탕을 물려준다. “어차피 잊혀질 테니 적당히 하라”는 뜻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괜히 반박하고 싶지 않은 그다. 그런가 싶다.

진실을 파헤치고, 따지려드는 태도는 견고한 집단사회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나 집단문화를 중시하는 일본, 그 중에서도 학교라는 집단에서는 그의 의견을 모두가 묵살하고, 무조건 복종하고 사과하라 명령한다. 어쩌면 개인과 소수의 의견이 침묵당하길 강요받는 한국의 상황 역시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럴때 개인의 발언은 무력화되고, 아무리 정확한 주장이어도 힘을 잃는다.


결국 호리 선생 역시 굴복한다. 분노와 의문이 일지만 집단의 압박에 반박하지 않고 꾹 참아낸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 스스로를 달래본다. 하지만 이 반응은 오히려 더 큰 불화를 낳는다. 가장 공정한 인물에 가깝고, 사건을 편견없이 보려고 노력하고, 왜곡하지 않고 보기 위해 애쓰지만 그의 이런 노력들은 ‘집단’ 안에서 무력화된다.


여자친구는 나중에 호리 선생이 가짜 뉴스로 신문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교직으로부터 퇴출당하자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다. 물론 이따위 태도를 갖고 있는 연인이라면 언제고 헤어져도 이상할게 없지만 버려지는 호리 선생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사실상 호리 선생의 비극을 주제로 다룬 영화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표현이다.   

(3) 요리  

요리는 미나토 주변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아이는 글자를 거꾸로 쓴다. 제대로 읽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어려움을 겪는다.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기 때문에 학습장애가 있다. 요리의 학습상태를 바르게 교정해줄 어른이 없었다.


사오리는 요리를 찾아가 “혹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니?” 라고 묻는다. 맞다. 요리는 반 아이들에게 심한 이지매,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양육자인 아빠는 정상 상태가 아니고, 담임 선생님도 이 사실을 몰랐던 듯 하다. 사오리는 요리에게 처음으로 “괴롭힘을 당하냐”고 물어봐준 어른이다. 물론 사오리는 그저 요리의 괴롭힘 가해자가 자신의 아들, 미나토일까봐 두려워 질문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에 무력화된 아이, 요리는 순종적이다. 상대방에 의도에 맞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사오리가 원하는 의도에 맞춰 대답한다.


“미나토가 저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호리 선생님이 항상 미나토를 때리곤 해요” 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오리의 확신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확보한 같은반 동급생의 증언은, 아들 미나토의 방황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바로 호리 선생의 괴롭힘 때문이라는 믿음에 연료를 붓는다.


요리는 아들의 방황의 이유를 찾아내려는 사오리나,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려는 호리 선생과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화된 캐릭터 그 자체를 표현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맞아 온 몸이 멍으로 물들고, 자신을 찾아온 미나토에게 해맑은 표정으로 “나 여자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전작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도 비슷한 아이들이 나온다. 가정폭력과 학대, 무관심에 방치되었어도 아이들은 그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최초의 기억을 가졌던 그때부터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았고,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다. 그래서 그게 잘못됐다거나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못한다. 한 인간의 세계관을 완전히 오류투성이로 프로그래밍한다는 점에서, 아동학대는 정말 끔찍한 범죄 중 하나다.


요리의 시점에서 영화가 펼쳐질 때,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 미나토와 요리가 어떤 감정을 주고받았고, 그래서 어떤 비밀이 생겨났고, 이 비밀 때문에 어른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오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실을 관객 모두가 알게 된다.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흐르고, 마지막까지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던 호리 선생에 의해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에 감춰진 비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아이들이 함께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여러 갈래로 나뉜다.


미나토는 영화 내내 사오리에게 묻는다.


“아빠는 새로 태어났을까?”

“그럴 수 있지.”


미나토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이대로 죽어 새롭게 태어난다면 원하는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생이 하기엔 어쩐지 듣는 이들이 아픈 질문.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볼땐 이들이 더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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