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더듬더듬 한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 집에 있는 동화책을 모두 없앴다. 하루하루 활자에 파묻혀 허덕이는 나였기에 아이들만큼은 조금 더 자유롭게 키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도 “책 읽어라~”라고 말해본 적이 없다.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에게 책을 주지 않은 나라는 존재는 매일매일 책을 들고 돌아다녔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책이라는 존재에 관해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무슨 보물이 숨겨져 있기에 엄마는 매일 저걸 펼치고 있을까 물음표를 띄우고 나를 쳐다봤다. 그때마다 책을 활짝 펼쳐서 네가 좋아하는 그림은 엄마 책에 없다고 확인시켜 줬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더 열정적으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이야기가 듬뿍 담겨있는 보따리들 말이다.
첫째와 둘째가 유아기를 지날 때 나는 대학원에 다녔다. 심화 과정을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 알지 못했기에 중증활자중독자를 표방하던 나에게도 입학과 동시에 위기가 찾아왔다. 매주 2,000페이지 이상의 단행본을 소화해내야 했던 나는 바닥을 닦자마자 책과 마주했고 설거지를 하자마자 문장에 파묻혀 시간 안에 다 읽지 못할 것 같은 초조함을 견뎠다. 그렇게 첫 학기의 끄트머리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장렬히 투항했다. 그런데도 잘 해내고 싶다는 미련이 생겨, 과제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링거에서 똑똑 떨어지는 액체를 보며 불안을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작전을 바꿨다. 매주 주어진 텍스트를 모두 읽고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강의계획서가 뜨자마자 주 교재에 있는 단행본을 방학 때부터 읽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책을 주진 않았지만, 책을 들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그렇게 1년 365일 자연스레 노출됐다. 아이들은 엄마만 재밌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와서는 괜히 책을 만지작거렸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저자의 생각을 인용하기 위해 책을 펼쳤을 때 하트와 함께 사랑한다는 고백이 삐뚤빼뚤 등장해 나를 설레게 하는 날도 늘어갔다.
우리 집 꿈나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열어줘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유치원까지는 가끔가끔 글자와 마주쳐도 됐지만 이젠 초등학생이니 교과서를 붙들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현저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에게 별관 4층에 가면 학교 도서관이 있으니 대출증도 만들고 책도 구경해 보라고 했다. 아이는 도서관에 갔으나 대출증 만들 용기는 나지 않아서 인기 있는 만화책을 실컷 보다가 내려왔다고 한다. 만화책이 재밌던 아이는 3월 내내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달려가 책을 읽다 내려왔다. 한 달이 지나 대출증도 생기고 책에 흥미도 붙은 것 같아서 그리스로마신화를 찾아보라고 했다. “사서 선생님이 저쪽으로 가면 있다고 했는데 없어” 입을 씰룩대며 며칠을 찾아 헤매던 아이는 어느 날 드디어 책을 찾았다고 신나서 말했다. 그런데 책이 두 권밖에 없어서 거의 다 읽어가서 아쉽단다. 내가 사줘야 하나 아니면 시립도서관에 가서 다른 책을 대출해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구매희망도서를 신청하라는 알림장이 왔다. 나는 초등학생이 읽을 수 있는 그리스로마신화 책을 10권 넘게 신청했다. 책이 온 날, 1권을 대출해서 집으로 가져온 아이가 혼자 낄낄거리며 소파에서 행복해하는 걸 보니 왠지 뿌듯했다. 그리스로마신화가 초등학생에게 먹히다니!
아이가 도서관을 정말 좋아하기에 학부모 도서위원도 신청했다. 아쉽게도 전교에서 나 혼자만 학부모 도서위원을 신청해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는 학교 끝나고 가끔가끔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간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엄마라는 버팀목의 든든함은 의외로 강했는지 우리 집 꿈나무는 첫날의 쭈뼛댐을 잊고 도서관에서 열리는 모든 이벤트에 참여하는 귀여운 1학년 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날 때 즈음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스로마신화 책 읽기 열풍이 시작됐다. “오~ 우리 딸, 유행의 선두주자가 됐네!”라고 웃어주니 친구가 1권이 없다고 10권부터 빌리는 바람에 자기는 10권을 읽을 차례인데 11권을 빌려왔다고 투덜댄다. 그래도 뒤돌아 씩 웃는 것을 보니 뭔가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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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분명 책을 좋아했다. 단군신화가 재밌어서 100번은 읽었던 것 같고 조선왕조실록도 끼고 살았다. 다독은 글짓기로 이어져 교내 독후감 쓰기 대회 등에서 수상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주변에서 잘한다고 계속 칭찬을 했던 것이 독이 되었을까. 나는 중학교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적 읽기와 작문의 수준이 늘지 않았다. 독서능력이 현격히 떨어지니 국어 수업 시간도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된 나에게 그 누구도 책을 어떻게 골라내야 하는지, 읽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을 배워야 할 국어 시간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시험에 나오는 정보들만 칠판에 줄줄 적혀있었다. 동시의 세계에 갇혀있는 아이에게 자유시니 정형시니, 만연체니 간결체니, 갑자기 등장한 단어들은 와닿을 리 없었다. 나는 길을 잃은 채 어딘가에 멈춰버렸다. 내 인생에 중학교라는 것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서 시간을 때우는 과정처럼 느껴졌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나를 세밀히 관찰해 보니 글이 읽히지 않아 멈춰있는 것이 보였다. 한국어를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상태. 음성으로 읽을 수는 있으나 의미 읽기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 말이다. 그러니 초등학교 내내 상위권에만 있었던 성적이 중학교에 가자마자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공부를 어중간하게 하는 아이로 남아 의미 없는 세계로 도망쳐버렸다.
아이가 어릴 때 책을 쥐여주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 보니 나의 독서 전환기 실패에 있었다. 어릴 때 괴로웠던 것들이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반복될 줄 알고 좀 덜 괴로워지라고 거리를 두게 했다. 성인이 되면 지금의 나처럼 자연스럽게 책을 고르고 읽고 활용할 거라 상상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내가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우리 아이에게는 내가 좋은 길잡이가 돼 주기로 말이다. 사주지 않았던 책도 서점에 가서 같이 고르며 책꽂이에 꽂기 시작했다. 엄마가 골라주는 책 한 권, 아이가 고른 책 한 권씩 말이다. 매주 서점에 가다 보니 주말마다 오는 손님이시지 않으냐고 점원이 물어본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책을 읽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려워 보이는 단어는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창의력에도 한계가 생겨 비슷한 질문을 남발하기 시작해 차선책으로 독서 논술 책을 구해다가 아이와 함께 수행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하는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나날이 독해능력도 늘어갔다. 최근엔 어린이 동화책 심사위원도 돼서 책을 읽고 자기의 생각을 적는 과정을 경험했다. 그런 여정을 거치니 아이의 자신감도 한층 높아져 새로운 것을 대할 때마다 쭈뼛거리던 모습도 사라졌다.
어른들이 해야 할 것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충고하는 게 아니다. 지금이라도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줘야 한다. 마흔의 코앞에서 깨달은 오늘, 아이가 써놓은 자기소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의 취미는 책 읽기입니다.” 이 흔하디 흔한 문장이 나의 중학교 시절의 방황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