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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하 Nov 14. 2024

이제 나는 썩지 않게 됐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나의 괴로움을 덮어 버린 적 있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무너지면 내 삶이 와르르 무너질까 봐, 나의 고통을 목 뒤로 꿀꺽 넘기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속이면서 절망과 배신감을 꼭꼭 씹어 삼키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를 믿게 되는 날이 온다. 내가 원하는 이상향을 말하고 또 말하다 보면 그것이 내 삶에 정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신기루를 만들어낸다. 그 오색찬란한 빛의 굴절 속에서 진실은 등장할 기회를 잃는다.


내가 삼켜버린 무언가는 그렇게 얹힌 채로 내 창자 속에 갇혀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저녁이 되면 온몸의 감각이 아리고 서글프다. 내가 잊어버린 무언가가 가끔가끔 밖으로 나올 기회를 노리는지 계속해서 나를 아프게 한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왜 괴로운 거지? 이젠 무언가를 소거해 버렸다는 사실조차 까먹어버려 삐뚤어진 나를 바로 잡을 수 없다. 나를 기만하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은 그렇게 나를 잠식했다. 내 삶은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로워야 하니까, 그것만이 최선인 듯 보였다.  

   

누군가의 인생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의 실체를 알게 된 날이 온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 사람이 말도 안 되는 누명으로 나를 모함하고 있을 때 나는 참았다.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있던 어떤 한 사람 때문이었다. 더럽고 억울했지만 그런 일은 애초에 없던 거니까, 내가 대응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시시하다고 말하며 끝낼 줄 알았다. 그러면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를 조용조용 유지해 볼 생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 억울해서 꽉 막힌 것 같은 통증으로 밤새 울어야겠지만, 그 정도로 넘어간다면 나는 이 아슬아슬한 곡예쯤은 무리 없이 지탱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분하고 답답했던 그 상황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독하게도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걸 교묘히 회피하며 사는 걸 즐겼으니까.


그런데 상대방은 아니었다. 하루라도 내 얘기를 안 하면 가려움증이라도 일어나는 건지 계속해서 입 쟁반에 올렸다. 훗날 알게 됐다. 왜 그렇게 나쁘게만 몰아갔는지,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지 말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될 때마다 나를 망가트려서 그 공허함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행복할수록 자기의 불행이 도드라져 보였는지 그때마다 나를 괴롭히며 떨어지는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인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악한 고리를 연결하며 자신을 끌어당겼다.   

  

결심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무언가 얹힌 채로 살아가는 것과는 이제 이별해야겠다고, 나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나조차도 허용하지 말라는 굳은 의지였다. 그래서 뱉어냈다. 고백의 결행은 밤이 짙어져 대기 중에 동동 떠다니던 수증기가 낙엽과 흙에 가라앉는 시간에 발생했다. 나는 이제 못 하겠으니 나와 그 사람의 연결 다리인 당신이 그 사람과 당분간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울었다. 그렇게 우린 휴대전화를 꺼내 아주 가볍게 차단 기능을 이용했다. 그걸 알게 된 상대방이 감히 나를 끊어내려 했다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종료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해결하지 않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연결 다리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앓았다.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썩은 채로 돌아다녔다. 이걸 꺼내지 않으면 너의 모든 것이 산산이 조각나서 분해될 거라며 경고등이 울렸다. 예전에 꼭꼭 씹어 삼켰던 진실이 꺼내 달라고 아우성친다.     

 

배신은 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연결 다리는 내 감시망을 피해 그 사람에게 연락했다. 애초에 끊을 수 없던 관계였으니 희미하게 연결될 것이라는 느낌은 있었으나 나를 가장 아끼고 지켜야 할 순간들에 등을 돌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관계의 재연결이 상대방을 통해 이뤄질 줄 알았지 내 연결 다리를 통해 이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갈등을 어물쩍 넘기길 좋아했기에 눈을 감아 버렸다. 어차피 처절하게 끊어낼 수 없는 사이라면 드문드문 발생하는 일 즈음이야 모르는 척 지내야 하는 것이 도의적으로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끝까지 나쁜 사람은 되기 싫었으므로 내 믿음을 저버리는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지만, 그냥 참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다는 말로 나를 버무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인간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있어서 누군가를 이간질하고 미워하며 모함해도 어느 정도 선은 지킬 줄 알았나 보다. 그것에 대한 무너짐이 곧 들이닥칠 줄 모르는 채 말이다.  

Image by yamabon from Pixabay

   

시간이 흘렀다. 도저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역겨웠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천박할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를 욕하던 고리들은 나만을 옥죄던 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그 사람은 계속해서 거짓과 과장,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놨고 타인을 비방했다. 그것이 한꺼 번에 자기를 향해 날아올 줄 모르고 말이다. 그렇게 매일 전쟁이었고 그 끝은 생명의 아스러짐이었다. 누군가의 빛이 꺼졌고 그 모든 중심에 그 사람이 있었다. 반성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믿고 있는 인간에 대한 한낱 희망이 부서졌다. 그래서 나는 내 연결 다리를 끊어내기로 했다. 더는 인간 아닌 것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끊어내야 했다. 내가 아무리 말한다고 한들 연결 다리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속이며 살리라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다리를 끊고 이어진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그것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내 소중한 것들을 포기해야 했기에 차마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인데 이제야 숨겨왔던 진실을 내 내장 속에서 꺼내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게 됐다. 연결 다리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냐며 처음엔 화를 냈고 설득하려 했고 애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내 속에 썩어가던 진실을 꺼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썩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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